2024,May 8,Wednesday

훈구파와 사림파의 충돌

 

지난 이야기
우리나라 최초의 개혁을 성공한 조선건국 세력들은 과전법 시행과 신분제도의 개혁으로 백성들의 경제적 안정 및 미래 희망을 제공합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가면서 개혁 세력은 기득권 세력으로 변질되고 부패화 됩니다. 그때 조선 건국세력의 부패에 도전하는 세력 “사림파”가 등장하여 조선 정치의 주류 세력이 변화 됩니다.

신진사대부에서 출발한 훈구파
조선건국 주도세력의 후예 훈구파와 100년 후 등장하는 사림파는 어떤 차이점을 가진 정치 집단 일까요? 고려말 성장한 신진 성리학자들은 위화도 회군으로 권문세족을 몰락 시킵니다. 공동의 정적 권문세족들을 제거한 신진사대부는 과전법 시행에 의견 차이를 보입니다. 권문세족이 소유했던 토지 중 백성들의 토지를 불법 강탈한 경우 전부 국가가 회수하여 본래 주인인 농민에게 반환을 주장하는 개혁파와 권문세족과 농민이 서로 양보하고 잘 타협하여 절충안을 만들자는 온건파로 의견이 나누어 집니다. 이때 정도전이 쐐기를 박는 명언을 남깁니다. “도적질한 물건을 되찾는데 도적과 반반씩 양보하여 합의 하라는 말이 있을 수 있는가” 급소를 찌른 이말에 의해 결국 신진 사대부는 개혁파와 온건파로 갈라집니다. 신진사대부 개혁파는 대부분 지방의 중소 지주층 이며 신진사대부 온건파는 권문세족 출신이거나 권문세족과 직 간접적으로 연관을 가진 세력들 입니다.
과전법 문제로 다투던 양쪽 세력은 나중에 조선을 건국하려는 세력과 고려를 지키려는 세력으로 구분 되기도 합니다. 일반인들은 신진 사대부 온건파는 고려에 대한 충신 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는 신진사대부 온건파의 후예인 사림파가 등장 하면서 내세운 명분을 백성들에게 쇄뇌 시킨 탓도 있습니다. 물론 개성 인근 두문동이나 강원도 거칠현동 출신 등 충절파도 일부 있었으나, 신진사대부 온건파 전부가 고려의 충신이라고 보기는 힘듭니다. 필자는 과전법을 둘러싼 경제적 이익 때문에 갈라졌다고 생각합니다. 개혁을 하면 뺏길 것이 많은 기득권 층은 저항하기 마련인데 자신의 이익을 반대 명분으로 내세우기 어려워서 국민과 국가를 거론합니다. 요즘 정치인도 항상 국민을 위해서 라고 주장하고 이익은 기득권 층에 돌아가는 경우가 많은 것과 같습니다. 또한 태종 이방원은 즉위 후 조선 건국 당시 자신이 죽인 정몽주를 충절의 표본으로 만듭니다. 이는 태종의 정변 당시 정도전을 죽인 명분 중 하나 이기도 하고, 왕실에 대한 신하들의 충성을 유도하는 측면도 존재했습니다. 어쨌든 신진사대부 온건파는 패배한 정치 집단이 되어서 대부분 학자들이 향촌으로 내려가서 후진양성에 전념합니다. 이렇게 신진사대부 온건파는 100년 이라는 긴 세월 기다림 끝에 정치에 등장하게 됩니다.

훈구파가 꿈꾸던 중산층의 나라
조선건국에 성공한 신진사대부 개혁파는 중산층 출신이 많아서 기득권 수호에 부담이 적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나라 최초의 서민을 위한 개혁법 과전법을 탄생 시킵니다. 그러나 태종 이방원의 정변과 수양대군의 정변 등을 거치면서 수천명의 공신을 만듭니다. 수양대군의 정변 후 즉 세조때 부터 신진사대부 개혁파는 훈구파로 부릅니다. 공신들은 공신전이란 토지와 노비를 하사 받고 면세와 상속 등 많은 특혜를 누립니다. 국가 토지의 감소는 농민의 경작지 감소로 이어져 소작농으로 전락되기 쉽습니다. 10%의 토지세 납부가 50% 소작료로 바뀌는 경우가 많아서 백성의 삶은 어렵게 됩니다. 게다가 흉년이나 전염병이 돌면 농민들은 자신의 경작지를 헐값에 팝니다. 물론 조선시대 토지는 전부 국가소유 즉 “왕토사상”이 지배 하므로 매매의 대상은 소유권이 아니라 경작권을 의미합니다. 토지 매입에 재미를 붙인 훈구파는 권력을 이용한 불법적 강탈도 합니다. 조선건국 후 100년 동안 개혁주도 세력의 부패는 이렇게 발생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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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건국 주류세력이 국가를 통치하던 100년 동안 신진사대부 온건파는 향촌으로 내려가서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고 후진들을 양성하는 한편 지방 토호들의 세력을 약화 시키고 지방세력을 장악 합니다. 신진사대부 온건파가 지방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던 이유를 살펴 봅시다. 고려는 지방 호족들과 연합하여 세운 국가입니다. 따라서 고려 중앙 정부의 권력이 약해서 지방 호족들의 자치권을 어느정도 인정하여 지방의 30% 정도만 중앙에서 수령을 파견 했습니다. 수령을 파견하지 못한 70%의 지역은 인근 지역의 수령이 간접 통치를 했는데 실제로는 지방 호족들이 다스리는 자치 구역입니다.

그러나 조선은 지방 호족들의 도움으로 세운 나라가 아니므로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중앙집권을 추구 합니다. 조선건국 20년 후 태종은 전국 360개 군현에 수령을 파견 합니다. 그러나 지방 토착세력 즉 지방 호족들은 교묘한 저항으로 수령들은 임무 수행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또한 당시 지방호족들은 사병을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신진사대부 온건파 학자들은 지역민들을 설득하여 중앙에서 파견된 수령들을 지원하고 토착세력을 억누르는 정책에 협조를 합니다. 즉 신진사대부 온건파 학자들은 지방 수령들의 책사 노릇을 했습니다. 신진사대부 온건파 학자들의 도움으로 지방이 안정되니 신진사대부 온건파는 지방세력의 중심으로 성장 합니다. 이렇게 100년 동안 학문에 몰두하고 후진을 양성 하면서 귄토중래 하던 신진사대부 온건파는 때를 만납니다.
조선건국의 주류들은 100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개혁사상과 백성들을 위한 위민 사상은 점차 사라지고 부패한 기득권 층으로 변질 됩니다. 훈구파 공신 견제의 필요성을 느낀 성종은 신진사대부 온건파를 중용 합니다. 이렇게 신진사대부 온건파는 중앙정치 무대에 나서고 세상 사람들은 이들을 사림파 (산속에서 공부한 선비라는 뜻) 라고 부릅니다. 고려말 성리학을 같이 공부했던 신진사대부, 이색학당에서 동문수학 하던 그들은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개혁파 온건파로 갈라지고 100년 후 훈구파 사림파로 이름을 바꿔서 다시 만납니다.

두 정치세력의 정치사상
조선초 정치집단의 성장과 변천에 대해 알았으니 이제 두 정치세력의 정치사상 즉 이념을 알아봅시다. 조선건국 세력들은 성리학의 이념에 매몰되지 않고 실용적 유교 정책을 폅니다. 과전법과 신분제도의 개혁은 시대의 요구를 수용한 위민정책 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집단으로 변질되어 퇴출 됩니다. 반면에 신진사대부 온건파의 후예들은 100년간 성리학 이론을 연구하여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도덕과 명분을 강조하여 군자 정치와 왕도 정치를 주장합니다. 경제적으로는 조선 건국 당시의 신진사대부 개혁파와 비슷한 지방의 중산층 출신 입니다.
학문적 소양을 갖추고 명분과 도덕을 앞세운 사림파는 시대의 요구를 잘 파악 합니다. 당연히 국왕과 백성들의 지지를 받고 정치의 주류를 이룰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오랜 정치적 경륜은 갖춘 훈구파의 역공에 의해 네번의 사화로 수천명의 사림파 선비들이 희생 됩니다. 100년의 기다림과 80년의 투쟁을 끝내고 사림파는 조선의 주류가 됩니다. 그러나 정권을 잡은 사림파는 국왕과 백성들의 기대에 부흥하지 못합니다. 야당 시절의 사림파는 집권당 훈구파를 비판만 해도 인기를 끌었으나 자신들이 집권하니 대안을 마련하고 위민 정치의 책임이 생깁니다.
그러나 권력을 잡은 사림파는 국왕과 백성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성리학 이념에 충실한 유교적 질서 확립에 몰두합니다.
그러면 정치투쟁에 패배한 훈구파는 어디로 갔을까요? 사림파 대간들의 탄핵을 받은 부패한 훈구파는 처벌 받은 후 정계 은퇴를 했고 젊은 훈구파의 자녀들은 사림파로 옮깁니다. 이렇게 하여 거대한 여당 사림파는 탄생한 것 입니다. 사림파는 조선을 자신들이 생각하는 이상 국가인 유교 사회로 만들어 갑니다. 유교적 예법을 세우고 신분을 양반 중인 평민 노비 등 네 계급으로 세분하여 신분에 맞는 직업을 맡깁니다. 또한 직업의 귀천을 마련하여 사농공상 이라는 직업의 계급화를 고착화 시킵니다. 신분은 하늘이 정한 이치라 바꿀 수 없다고 합니다. 사림파는 정권획득 후에도 성리학 연구에 몰두하여 현재 중국과 일본 등 세계 여러나라에서 유교를 배우러 한국에 옵니다. 유교의 이론적 정비가 최고인 나라 한국입니다. 그러나 백성들의 삶은 조선 초 보다 갈수록 힘들어 집니다. 그러나 교육에 힘쓴 사림파 덕분에 세계 최저의 문맹율과 도서 보급율 최고를 자랑 합니다. 우수한 우리 역사이고 뭔가 부족한 우리 역사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사림파 정치와 4색 당파의 발생 과정을 살펴 보겠습니다.

다음 이야기
사림파는 100년의 기다림과 80년의 정치 투쟁으로 정권 획득에 성공 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의 삶, 부국강병 보다 이념에 충실하다 분당에 분당을 거듭 합니다. 이른바 4색 당파의 출현 입니다.

전 종 길
영남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前 (주)대은영상 대표,
現 아마추어 사학가 활동,(주)하나로 축산 대표
Kakao talk ID : jeonjongkil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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