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May 3,Friday

쇼팽이 사랑한 피아노, 폴란드, 조르주 상드

이순신 공항? 유관순 공항? 어감이 어떠한가? 외국에 나가면 국가영웅들의 이름을 딴 공항들이 종종 있다. 폴란드의 ‘바르샤바 쇼팽 국제공항’도 그 중 하나이다. 국제공항이라…폴란드인들이 얼마나 쇼팽을 자랑스러워하는지 보여주는 부분이다. 그렇다. 쇼팽은 폴란드의 자랑이다. 비록 프랑스인 이민자였던 부친으로 인해 반쪽짜리 폴란드인이었고, 러시아의 압제를 피해 스무 살에 프랑스로 떠난 이후 사망할 때까지 다시는 조국 땅을 밟지 못했지만, 그는 자신의 반평생 동안 조국 폴란드를 끊임없이 그리워했던 ‘한 많은’ 음악가였다. 폴란드인에게 있어 쇼팽은 우리가 말하는 ‘피아노의 시인’ 그 이상의 특별한 의미가 있다. 그는 폴란드인들의 정서 깊숙이 자리 잡은 민족적 상징이다. 그렇다면 음악을 통해 폴란드인의 마음을 하나로 연결해 준 쇼팽의 힘은 무엇일까?

진정한 피아노맨
쇼팽은 1810년 2월 22일 폴란드 바르샤바 근교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폴란드의 모차르트’ 라는 닉네임을 달고 마을을 떠들썩하게 했다. 4세 때 처음으로 건반을 만지기 시작한 쇼팽은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작곡을 시작했다고 하니 ‘모차르트’가 환생한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 했겠다. 특이한 점은, 쇼팽이 여느 음악가들과 달리 일생동안 오로지 피아노라는 악기에만 집중했다는 것이다. 200여곡이 넘는 쇼팽의 작품 목록은 거의 피아노곡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물론 20여 개의 가곡과 몇 곡의 실내악을 남기긴 했지만, 전 세계적으로 사랑을 받아 온 주옥같은 쇼팽의 피아노 작품들에 비해 그 존재감이 희미한 것이 사실이다. 쇼팽은 가늘고 긴 손가락을 가졌었다. 왜소했으며 건강한 체격이 아니었다. 게다가 숫기 없고 상당히 소심했던 그에게는 다른 연주자들과의 사전 대화가 필요한 앙상블이나 큰 규모의 오케스트라 곡을 작곡하는 것보다 혼자 연주, 완성 가능한 피아노 독주곡 작곡이 더 만만했던 모양이다. 아니, 그는 자나 깨나 피아노만을 사랑했던 진정한 피아노맨 이었다. 그에게 있어 피아노 건반은 물고기가 맘껏 놀 수 있는 적당한 수온의 ‘물’이었다.

죽어서도 사랑하리, 나의 조국 ‘폴란드’
쇼팽은 프랑스인 아버지와 폴란드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프랑스 파리로 가기 전인 1830년까지 바르샤바에서 살았다. 당시의 폴란드는 러시아의 압제로 인해 정치적으로 상당히 어수선했다. 폴란드인들은 제정 러시아의 식민지화를 반대하는 시위를 일으켰지만 실패하였고, 이후 러시아는 더욱 잔인하게 폴란드를 억압하고 있었다. 군대에 자원입대해 총과 포를 메고 몸을 던지는 것이 가장 빠르고 직접적인 독립운동이라고 생각한 쇼팽의 친구들은 하나 둘 군에 자원입대해 떠나갔다. 겁 많고 소심했던, 피아노밖에 만질 줄 모르던 청년 쇼팽이었지만 친구들과 뜻을 함께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심각한 갈등을 하게 된다. 그 때, 아버지는 이렇게 조언을 한다.
“몸을 던져 죽는 것만이 애국이더냐, 너는 살아 남아 음악을 통해 애국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 비록 당시로서는 비겁한 선택으로 보였지만, 쇼팽은 더 이상 음악가로서 설 곳이 없었던 폴란드를 떠나 프랑스 파리에 자리를 잡았다. 러시아의 지배하에 있던 폴란드를 안타까워하면서도 달려가 뭔가를 할 수 없었던 쇼팽은 대신 <마주르카, 폴로네이즈, 폴카, 크라코비아크> 등의 폴란드 민속 리듬을 토대로 한 수많은 명곡들을 작곡해 널리 알림으로써 폴란드인으로서의 민족의식과 정체성을 드러내었다. 특히 무려 57곡에 이르는 마주르카(둘째 박 또는 셋째 박에 강세가 들어가는 다분히 향토적인 서민 춤곡)와 16곡의 폴로네이즈(마주르카에 비해 규모가 크고 귀족적이며 공개 연주회에 어울리는 성격의 3박자 춤곡)는 그가 평생 아끼던 ‘애국’ 작품들이다. 1849년 10월 17일 새벽, 쇼팽은 세상과 작별을 고하며 임종을 지키던 누이에게 이렇게 유언 했다.
“누이~ 내 비록 몸은 프랑스에 있지만, 내 영혼은 조국 폴란드와 항상 함께 했어. 내가 조국에 묻힐 수 없다면 내 심장만이라도 폴란드 땅에 묻어줘.”당시 폴란드를 점령하고 있던 러시아 정부는 망명 음악가 쇼팽의 시신을 거부한다. 해서, 누이 루드비카는 쇼팽의 시신에서 심장만을 적출하여 바르샤바의 ‘홀리 크로스’ 교회에 안치함으로써 쇼팽의 유언을 지켜준다. 폴란드의 독립을 간절히 염원했지만 결국 죽을 때까지 볼 수 없었던 쇼팽. 그렇지만 폴란드의 민족정신과 애국혼이 깃든 수많은 쇼팽의 작품들은 우리와 그를 끊임없이 연결해 주는 ‘끈’이 되어 주고 있다.

남장의 이혼녀 ‘조르주 상드’
쇼팽의 삶에서 빠질 수 없는 여인이 한 명 있다. 그녀의 이름은 ‘조르주 상드’. 쇼팽보다 여섯 살 연상이었던 상드는 거침없는 성격의 여류소설가였다. 열여섯 살에 지방 귀족 ‘뒤드방’ 남작과 결혼했지만 순종적인 시골 영주의 안주인은 그녀의 밥그릇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남작과 헤어지며 두 아이를 데리고 나와 프랑스 파리로 이주, 거기서 쇼팽과 운명적으로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이 두 사람의 첫 만남 당시, 쇼팽은 이제 막 파리에 알려지기 시작한 신참 음악가였지만 상드는 운 좋게도 그녀의 처녀작 <앵디아나(Indiana)>가 대히트를 치는 덕에 무명생활을 가뿐히 생략하고 쭉쭉 뻗어나가던 인기소설작가였다. 소셜 파티에 나타난 상드의 모습은 파격적이었다. 여성의 참정권은 커녕 대학입학도 허락되지 않던 그 당시, 남자 차림을 하고 손가락 두 배만한 시가를 거침없이 피워대던 당돌한 여인이었다.
암튼 이 <여자같은 남자>와 <남자같은 여자>의 만남은 뭇사람들의 단골 뒷담화 주제가 되기에 충분했다. 여섯 살이나 많은 여자가, 그것도 두 아이가 있는 이혼녀가, 여리고 순박한 청년 음악가를 유혹해 자신의 사교에 이용한다는 둥, 남성편력이 대단했던 끼 많은 상드에게 101번째로 걸려든 남자가 불쌍하게도 쇼팽이라는 둥… 대중의 따가운 시선을 한 몸에 받던 이 ‘요상한 커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9년 동안이나 열렬히 사랑하고 열렬히 싸우는 연인이었다. 특히, 상드를 만나던 시점에 폐결핵을 앓기 시작한 쇼팽을 상드는 헌신적으로 간호했다.
쇼팽의 명작들은 거의 모두 상드와의 열애 시절에 작곡된 것이다. 사실 표면적으로 봤을 때, 절절한 사랑이라기보다는 예술적 동지로 보였던 이 커플. 비록 둘 사이의 성격차이로 결국 이별을 해야 했지만, 상드는 쇼팽에게 있어 끊임없이 솟아나는 ‘영감의 원천’이었으며 ‘음악의 뮤즈’였던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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