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June 3,Wednesday

낯선 상대를 대하다

두 달이 넘어 지낸 일임에도 지루하고 긴 하루를 보낸 것과 같았습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무기력함에 사지를 눌려 지낸 듯했습니다. 그동안 다른 동네에서 벌어진 이야기 같이 들려오던 소식이 7군의 어떤 아파트, 자주 방문하던 2군의 어떤 지역, 내가 사는 곳 근처의 아파트, 심지어 오전에 사람을 만나 협의하였던 바로 그 장소의 아파트가 격리되었다는 소식을 실시간으로 듣는 것만으로도 시시각각 목이 조여오는 느낌이었습니다. 실체도 없는 낯선 상대에 의해서 말입니다. 숨이 막혀왔습니다.

사람들은 낯선 것에 두려움을 느낍니다. 이런 현상을 영화에서는 이방인의 내습으로 그리곤 했습니다. 미지의 존재를 특별히 공포스럽게 묘사하는 할리우드의 접근방식은 이런 심리적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에일리언을 비롯해 우주의, 또는 심해의 낯선 존재들이 탄생했고 때론 인기를 끌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우리가 겪은 상대는 달랐습니다. 보이지 않았고, 누군가의 입을 통해서 만들었으며 움직임이 신속하여 나라들마다 전시상황이라는 거친 표현들을 꺼내 들게 했을 만큼 대처에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이 낯선 상대를 공포스럽다 불러도 그리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불과 며칠 전까지 우리 모두가 겪던 상황입니다.

낯선 상대의 침입에 대한 대처는 나라마다 달랐지만 여기에 맞서는 수상 지시문 16호의 위력은 대단했습니다. 순식간에 많은 것들이 정지했습니다. 마치 상영 중이던 영화의 전원코드가 순간적으로 뽑힌 것과 같았습니다. 필름은 멈췄고 사진 속 모든 움직임도 따라서 정지했습니다. 모든 이들을 감염시킬 기세이던 낯선 상대도 주춤했습니다. 자신을 얻은 정부는 지난 주 15호 수준으로 완화령을 내렸습니다. 사회가 다시 빠르게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습니다. 아직 이전의 삶으로 복귀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비록 사회가 기능을 시작했다 할지라도 예전에 누리던 모습과는 다른 것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전염병과 함께 살아가는 사회라는 표현 속에서 그러한 요구를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지되었던 필름이 다시 돌아가고 있습니다. 다소 느려지긴 했지만 컷과 컷 사이에 ‘활기’라는 것이 숨을 쉬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낯선 상대에 대한 두려움도 많이 수그러 들었습니다. 이제 이 상대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에 대해 생각해 볼 때가 오고 있습니다.
COVID-19는 한풀 꺾이는 듯합니다. 물론 이른 판단입니다. 싱가포르의 한 대학에서 A.I로 예측한 전세계의 종식일은 올해 말인 12월 9일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 대하여는 5월 12일을 종식일로 예측했습니다만 종식 선언에 부정적인 입장의 석학들은 바이러스가 다시 활동할 가능성에 대하여 경고하고있으니 긴장을 늦출 일은 아닙니다. 심지어 공존의 방법을 모색하자는 말도 나오고 있으니까요. 그러니 우리나라가 빨리 벗어날 거라 해서 안심할 일이 아닙니다. 이번 기회에 세계가 어떻게 연결되었는지 몸으로 체험했으니 지구가 앓는 몸살이 낫도록 힘을 합쳐야 하는 게 중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거나 지금 단계에서 살펴보면 우리나라나 베트남은 이 낯선 상대에 대해 대처를 잘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갖습니다. 대처의 방식은 서로 많이 다르지만 결과로 보면 성공적이라 말할 수 있을 만합니다. 그 과정을 보면서 이번 기회에 베트남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이들의 관점과 반응에 대해서 말입니다. 어떤 이들은 체제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너무 가벼운 결론입니다. 제가 말하는 새로운 시각이란 우리가 이들의 체제는 물론 그 체제 아래의 의사결정구조와 그것을 수용하는 각 급 정부 간 위계와 한계, 그리고 여기에 반응하는 시민의식과 어려움에 대해 인내하는 문화와 그 문화를 가능하게 한 역사적 배경을 알지 못한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인정이야 말로 세계를 하나의 울타리로 안고 살아야 하는 글로벌시대에 필요한 기본 소양입니다. 그래야 상대를 이해하기 위해 마음을 열 수 있으니까요. 그렇지 않을 때 타민족에 대한 이해의 부족이 자칫 섣부른 평가로 이어져 서로의 관계를 해치고 다시 부메랑이 되어 우리에게 날아올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순히 국가시스템의 문제라며 베트남이 해 온 반응과 그들의 인내심의 근거를 평하는 것은 반미는 식사가 아니라며 문제를 일으키는 것만큼이나 상대에 대한 지식이 없음을 드러내는 것이고 나아가 상대에게 무례가 될 확률이 높습니다. 그런 무지가 우리에게 잘해 준 나라만 잘해 줄게 라는 다소 유치한 반응을 이끌어 내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니 이런 치우친 사고와 일부의 지식을 전부로 알고 입방아 찧는 언론이나 유투버들이 우리를 갑갑하게 하는 진짜 주범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합니다. 그런고로 저 역시 그간 베트남을 좀 아는 ‘체’해 왔는데 잘 모름을 인정하고 말을 아끼고 상대 알기를 먼저 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낯선 상대를 대하는 바른 태도일 것입니다.

세상이 혼란해졌습니다. 앞으로 더욱 혼란해질 것입니다.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세계를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자기 위안에 불과합니다.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인간의 능력을 세상에 떨치기 위해 세웠던 탑을 바벨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그 이름의 뜻 역시 혼동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태는 어떻게 해결이 될까요?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정부의 강력한 조치 때문이 아니라 자연이 그것을 치유한다는 것을요. 우리가 자연에 대한 겸손함을 되찾아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많은 경우에 백신이 없었음에도 인간의 몸이 그것을 견디게 하고 치료하게 했습니다. 그러니 약은 옆에서 거드는 것이지요. 슬램덩크라는 농구 만화에 왼 손은 거들 뿐이라는 유명한 대사가 있습니다. 이 만화 속의 진리는 너무나 겸손하고 옳습니다. 그러고 보면 정말 중요한 것들을 놓치고 살면서 부산을 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엇이 공포인지 정체를 모르는 채 공포에 사로잡혀 숨이 막혀 있는지도요.

사회적 격리 강화 시기에 스마트폰을 꺼두는 습관을 들였습니다. 오후 7시 이후로는 울리지 않도록 벨도 꺼 두었습니다. 비즈니스 하는 사람이라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해보니 그거 별거 아닙디다. 자기 말 토해내기 바쁜 유투브 검색하기도 중지했습니다. 그런 상태로 주일에 조용히 하루를 보내 보았습니다. 문득 놀라운 것을 이 정지의 시기에 다시 깨닫게 됩니다. 신은 위기와 공포의 시간에 또다른 평화의 시간도 함께 주신다는 것을요.
이제 옥죄였던 제한들이 조금씩 풀려갑니다. 그러나 느끼는 자유는 이전보다 훨씬 큽니다. 이 경험이 얼마나 소중한가요. 그러므로 눈을 들어 하늘을 보고 다시 눈을 돌려 지나가는 오토바이의 행렬들을 보면서 여전히 살아 있음에 감사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봅니다. 바람이 좋습니다. 나무의 흔들림이 아름답습니다. 하얀 꽃의 향기가 기억납니다. 비록 COVID-19라는 낯선 상대가 여전히 저 만큼의 거리에 멈추어 서서 바라보고 있지만, 그럼에도 아, 여기에 생명의 힘이 있습니다.

 

박지훈 성균관대학교에서 건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건축가이자 ‘몽선생의 서공잡기’, ‘크룩스크리스티’의 저자이며 일러스트레이터로도 활동했다.
현재 설계, CM전문회사인 정림건축의 베트남 법인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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