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April 27,Saturday

공민왕의 개혁

지난 이야기
고려말 개혁의 필요성이 대두된 이유는 피폐해진 국가 재정과 굶주린 백성들 때문입니다. 왕실과 귀족들의 사치로 국고는 텅텅 비어 있고 백성들은 하루 종일 일해도 배고픔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새로운 학문 성리학이 배출한 신진사대부는 기득권 세력인 권문세족들과 정면 승부를 펼칩니다. 개혁의 선두주자 정도전은 위화도 회군으로 권문세족을 일거에 소탕하고 새로운 세상을 열어갑니다.


 

충선왕의 시도
무신정권 100년을 거친 후 몽고 간섭기 80년 동안 원나라와 결탁한 부원배들의 횡포에 전답을 빼앗기고 고통받는 고려 백성들은 새로운 세상을 원했고 이러한 사태를 직시하고 개혁을 추진한 고려의 임금들이 있었습니다.
우리역사 최초의 혼혈 임금 충선왕은 아버지 충렬왕과 어머니 제국대장공주 (원세조 쿠빌라이의 후궁의 딸)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 국왕입니다. 충선왕의 아버지 충렬왕은 원 간섭기 당시의 정치 상황을 극복할 생각은 전혀 없고 사냥과 향락 등 방탕한 생활을 했습니다. 충선왕의 어머니는 원 제국의 황녀라는 자부심이 넘쳐 원나라의 속국인 고려를 무시합니다. 게다가 향수병으로 우울증까지 겪은 제국대장공주는 남편과 금슬이 좋을 수 없었는데 이러한 국왕 부부의 불화는 부원배들의 수탈로 이어져 백성들의 고통을 초래했습니다. 어머니의 영향을 받은 충선왕도 원나라 황제의 외손자라는 사실을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했고 아버지 충렬왕을 못 마땅하게 생각하여 정치적 대립을 합니다. 충선왕이 22세가 되던 1297년 어머니 제국대장공주가 죽자 원에서 머물던 충선왕은 급히 귀국하여 어머니의 복수를 한다며 아버지 충렬왕이 총애하는 “무비”를 죽이고 북경으로 돌아갑니다. 원으로 돌아간 충선왕은 원 황제의 힘을 빌려 아버지 충렬왕을 밀어내고 1298년 고려 제 26대 왕으로 등극합니다. 젊은 충선왕은 원나라에 기생하는 부원배들의 부패를 척결하고자 했으나 기득권 층의 반발과 원의 간섭으로 실패합니다.
불혹의 나이가 된 충선왕은 아들 충숙왕에게 양위하고 연경(북경)에서 만권당을 열어 학자를 양성합니다. 충선왕은 고려 학자를 연경으로 불러 중국 학자들과 학문의 교류를 추진했습니다. 당시 안향 이제현 이곡 등 유명 학자들은 성리학을 고려에 정착시키고 후진들을 양성합니다. 이들이 양성한 뛰어난 학자들은 공민왕의 개혁에 동참하고 조선 건국으로 이어집니다.

공민왕의 개혁과 부원파 척결
1300년대 초반, 고려말 임금들은 원의 간섭으로 백성들을 위한 정책을 펴지 못했고, 원나라에 아부한 간신들은 백성들의 토지를 수탈하여 치부하던 시절입니다. 고려의 혼란은 몽고에게도 골치거리입니다. 당시 한족의 동향이 심상치 않았고 북방민족들이 움직이고 있었던 시기라서 고려를 안정시켜 후방을 든든히 하는게 원나라 이익에 부합됩니다. 원 순제는 12살의 어린 충정왕을 폐하고 10년 동안 볼모로 지내던 충숙왕의 서자 왕전을 (공민왕) 고려왕에 책봉하여 고려로 보냅니다. 당시의 원나라는 고려왕의 임명과 폐위를 수시로 했습니다.
암울한 그 시절에도 꿈을 키워가던 21세의 젊은 공민왕에게 기회가 왔습니다. 1351년 공민왕은 10년 볼모생활을 접고 고려 제 31대 국왕으로 등극합니다.
공민왕은 등극하자 곧 평소 계획했던 개혁 정책을 실시합니다. 몽고식 변발과 복장 등 모든 몽고 풍속을 폐지하고 기황후의 오빠 4명을 (기철 기원 기주 기륜) 역모죄로 몰아 척살합니다. 당연히 기황후는 펄펄 뜁니다. 원나라 조정은 공민왕에게 국왕으로 책봉시켜준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사람이라고 비난하는 국서를 보냈는데, 공민왕은 불같이 화를 내며 말합니다. “우리 태조께서 세우신 고려를 왜 몽고가 임금을 임명하고 은혜를 운운하느냐” 이처럼 공민왕은 오랜만에 나타난 자주적인 고려의 임금입니다. 부원배 척결과 내정의 변화는 개혁의 양 날개입니다.
10년간 볼모 생활을 하며 수집한 몽고 내부 정보를 바탕으로 공민왕은 자신 있게 몽고 청산작업을 합니다. 고려의 영토를 잠식하고 있는 쌍성총관부 수복에 골몰하던 공민왕에게 뜻 밖의 기회가 찾아옵니다. 1355년 몽고의 천호장 이자춘의 (이성계의 아버지) 귀순입니다. 용기를 얻은 공민왕은 다음해 유인우를 보내 쌍성총관부를 공격하고 이자춘은 내부에서 호흥하여 몽고 관리들을 추방하고 고려의 영토를 수복합니다. 곧이어 정동행성 이문소를 혁파하여 치안권을 회복합니다. 부원배들을 척결하고 자주권 회복을 완성한 공민왕은 문음제도에 의한 관리 임명을 제한하고 과거제도를 활성화하고 성균관을 정상화, 신진사대부 양성을 진행합니다. 최영 장군을 중심으로 하는 신흥무장 세력의 도움을 받은 공민왕은 신진사대부까지 얻어 문, 무 양날개를 다 갖추게 됩니다.
공민왕의 개혁정책은 몽고세력을 몰아내고 국가의 자주성을 확보하는 것과 부패한 권문세족의 특권을 폐지하고 백성들의 삶을 돌보는 개혁을 추진하는 것입니다. 공민왕은 등극 후 6년간 원나라의 간섭을 끊고 자주성을 회복했습니다. 다음 단계인 부패한 내정을 개혁할 즈음에 고려는 외적의 침략(외환)에 시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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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의 위기와 고난
1357년 몽고에 쫓긴 홍건적이 압록강을 넘어 수도 개경까지 점령하자, 공민왕 부부는 경상도 복주로 (지금의 안동) 몽진을 갑니다. 당시의 복주 백성들은 공민왕 부부를 극진하게 모십니다. 이성계는 아버지 이자춘의 상을 당하여 상주의 몸으로 출전하여 홍건적을 물리치고 공민왕은 개경으로 돌아옵니다. 전란이 끝나고 복주의 지명을 안동(동쪽의 편안한 곳)으로 개명하고 도호부로 승격시킵니다. 또한 안동 지역의 조세와 부역을 면제시킵니다. 홍건적이 사라지고 이번에는 여진족이 고려를 침략합니다. 원나라 장수 나하추가 여진을 이끌고 함경도 방면으로 고려를 침략했으나 함흥평야 대전에서 이성계에게 패한 나하추는 두만강 넘어 도주합니다. 산너머 또 산입니다. 공민왕의 반원 정책을 묵인할 수 없었던 원나라는 공민왕을 폐위하고 덕흥군을 고려왕에 임명합니다. 일만 군대를 몰고 고려왕으로 등극하러 오는 덕흥군을 최영과 이성계는 물리칩니다. 이러한 공적을 쌓은 이성계는 20대 젊은 나이에 최영 장군과 함께 1등 공신이 되어 밝은 미래를 보장받습니다. 공민왕은 고집이 쎄고 신념이 투철하여 한번 결정한 일은 좀처럼 포기하지 않는 성격인데 원나라 세력의 척결 후 8년간 계속되는 외환과 볼모시절 공민왕을 수행했던 김용의 반란과 기득권 층의 반발로 백성들을 위한 개혁정책 추진이 지지부진 했습니다. 게다가 공민왕의 정신적 버팀목인 왕비 노국공주의 죽음을 맞이한 공민왕은 절망에 빠지게 됩니다.

신돈의 등용과 신진사대부의 부상
공민왕의 개혁정책은 권문세족들의 반발로 어려움을 겪게 되자 파격적인 인사를 단행합니다. 기득권 층이 주도하는 개혁은 한계가 있다고 본 공민왕은 양반이 아닌 천민 출신 신돈을 등용합니다. 신돈의 어머니는 옥천사의 여종인데 어려서부터 절에서 자란 신돈은 자연스럽게 스님이 되었습니다. 법명은 편조이고 신돈은 환속 후 지은 이름입니다. 신돈의 개혁정책 핵심은 토지제도와 노비제도에 있습니다. 권문세족이 백성들의 토지를 강탈한 경우 토지를 원 주인에게 돌려주고 토지를 뺏긴 백성들이 권문세족의 노비가 된 경우 고려초 광종의 노비안검법을 부활시켜 평민으로 풀어주는 정책입니다. 불제자인 신돈은 유교에도 호의적인 태도를 보여 성균관을 활성화하고 이색을 성균관 대사성에 (요즘의 서울대 총장) 임명하고 정몽주 이숭인 김구용 등을 교수로 천거하여 학문을 진작 시킵니다. 또한 정비된 과거를 시행하여 젊은 학자를 대거 등용합니다. 그리고 이성계 장군을 도통사로 파견하여 요동을 공격합니다. 일반인이 잘 모르는 공민왕의 요동 정벌입니다. 요녕 즉 현재의 심양을 점령한 이성계는 군량 부족과 추위로 곧 철수를 했습니다. 훗날 실학자 안정복은 공민왕과 신돈의 판단 착오로 만주 수복의 기회를 잃었다고 애석해했습니다. 이러한 신돈의 개혁정책은 많은 반발을 부릅니다. 기득권 층 권문세족은 자신들의 이익이 침해당하여 반발했고, 신진사대부들은 자신들의 생각과 비슷한 정책이지만 천민 출신 신돈이 주도하는 정책이라 권문세족들과 한 목소리로 반발합니다. 당시의 계급사회는 천민 출신 신돈이 주도하는 정책이 백성들의 삶을 이롭게 한다고 해도 용납되기 어려웠나 봅니다. 당시 신돈을 비난하는 상소 대부분은 정책의 비판이 아니라 인신 공격성 내용입니다. 공민왕도 지나치게 비대한 신돈의 권력이 부담스러워 결국 신돈을 역모죄로 몰아 귀향 보내고 곧 참수형에 처합니다. 신돈이 죽은 후 신진사대부는 자신들이 주도하여 신돈의 개혁 정책과 닮은 정책을 펼칩니다.
신돈을 죽인 공민왕은 의지할 곳이 없어 3년간 방황하다가 홍륜 등 자제위의 반란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합니다.

* 쌍성총관부 : 현재의 평안북도 지역과 함경도 지역을 무단 점령한 몽고는 지역 명칭을 쌍성총관부라 부르고 직할지로 삼아 몽고 관리를 파견하여 직접 통칭하던 지역.
* 정동행성: 원래는 일본 원정을 준비하던 관청, 일본원정 실패 후에도 가루가치를 파견하여 고려의 내정간섭 기구로 변질됨.
* 이문소: 정동행성의 무력적 기반이 되고 치안권을 행사한 관청 요즘의 경찰청. 이문소는 부원배를 보호하고 고려의 충신들을 탄압하는 역할을 했음
* 문음제도: 5품 이상의 자녀에게 과거시험을 거치지 않고 벼슬을 주던 상류층을 위한 특혜


 

다음 이야기
공민왕이 죽고 어린 우왕이 등극하자 권문세족들의 수장 이인임은 국정을 농단합니다. 개혁의 화신 정도전은 절대 권력자 이인임과 목숨을 건 승부를 펼칩니다. 다음 시간에는 시대를 앞서가는 개혁가 정도전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전 종 길
영남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前 (주)대은영상 대표,
現 아마추어 사학가 활동,(주)하나로 축산 대표
Kakao talk ID : jeonjongkil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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