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December 1,Tuesday

‘악의 꽃’ –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
Charles Pierre Baudelaire, 1821~1867
참고한 책 : ‘악의 꽃’ – 샤를 보들레르 지음, 황현산 옮김, 민음사, 2016.05

‘악의 꽃’ 은 보들레르의 유일한 시집이다. 19세기 프랑스 사람, 보들레르는 자신의 유일한 시집에 대해 스스로 평하기를 “세상의 모든 고통을 담아 놓은 사전”이라 말한다. 6세때 아버지를 잃었고 젊은 엄마는 곧 군인과 결혼했으니 예술가의 피를 이어받은 아이의 유년시절은 밝지 않았다. 늘 고독했고 우울과 모멸감이 그를 살찌웠다. 그의 시는 세상을 저주하는 어린 영혼의 몸부림이었다.

이 시집에는 ‘알바트로스’라는 시가 있다. 알바트로스는 ‘신천옹’으로 불리는데 길이가 2미터가 넘는 큰 새다. 한번의 날갯짓으로 수 십 리를 날고 대륙을 넘어 다닌다. 반면, 그 긴 날개 때문에 땅에 내려오면 제대로 걷지를 못한다. ‘지나치게 큰 날개 때문에 뒤뚱거리고 넘어지기 일쑤다. 절벽이나 높은 산처럼 상승기류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이 아니면 스스로 힘으로 날아오르기도 쉽지 않다.’ 보들레르 자신은 알바트로스에 비유한다. 높은 인간적 시선을 가지고 있지만 구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데는 세상에 농락당하고 넘어지는 알바트로스에 자신을 투사한다.

알바트로스 -보들레르-

흔히 재미 삼아 뱃사람들은
커다란 바닷새, 신천옹을 잡는다
태평스런 여행의 이 동반자는
길은 바다 위로 미끄러지는 배를 따른다

일단 갑판 위에 내려놓으면
이 창공의 왕들은 어색하고 수줍어
가련하게도 크고 흰 그 날개를
노처럼 그들 옆구리에 끌리게 둔다

이 날개 달린 나그네
얼마나 어설퍼 기가 죽었는가!
전엔 그처럼 아름답던 그가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추한가
어떤 친구는 파이프로 부리를 건드려 약을 올리고
다른 친구들은, 창공을 날던 이 병신을 절름대며 흉내 낸다

시인도 구름의 왕자와 같아서
폭풍우를 다스리고 사수(射手)를 비웃지만
야유 소리 들끓는 지상으로 추방되니
거대한 그 날개는
오히려 걷기에 거추장스러울 뿐.

알바트로스는 자유의 자기투사다. 그러니까 알바트로스가 ‘시인’ 이라면 자유의 의인화된 존재로 치환할 수 있다. 사회에 태어난 한 인간의 자유는 늘 무시당하고 제약당하며 억압된다. 삶에서 자유라는 게 실현될 리는 어렵다. 시인, 자유로운 사람의 날개는 세상 살기엔 적합한 게 아니다. 그러나 한번 바람을 타고 날게 되면, 즉 누군가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라 자신이 시켜서 하는 일을 하게 된 사람은 매일을 구만 리 장공을 날아다니는 환희로 살게 되지 않겠는가.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보들레르의 알바트로스는 장자의 붕鵬 새와 겹쳐진다. 이 지적 유사성을 들고 2천 년을 가로질러 보자. 앞서 본 칼럼에서도 소개한 바 있는 장자 내편 ‘소요유’와 알바트로스의 ‘자유’와 비교해 읽어 보자.

“북극 바다에 고기가 있는데 그 이름을 鯤(곤)이라 하였다. 곤의 길이는 몇 천리나 되는지 알 수가 없다. 그것이 변하여 새가 되면 그 이름을 鵬(붕)이라 하는데 붕의 등도 길이가 몇 천리나 되는지 알 수가 없다. 붕이 남극 바다로 옮아 갈 적에는 물을 쳐서 삼천 리나 튀게 하고 빙빙 돌며 회오리바람을 타고 구만 리나 올라가며 육개월을 날아가서야 쉬게 된다고 하였다. 매미와 작은 새가 웃으며 말하였다. ‘우리는 펄쩍 날아 느릅나무 가지에 올라가 머문다. 때로는 거기에도 이르지 못하고 땅에 떨어지는 수도 있다. 무엇 때문에 9만 리나 높이 올라 남극까지 가는가? 작은 지혜는 큰 지혜에 미치지 못하고 짧은 동안 사는 자는 오래 사는 자에 미치지 못한다. 아침 버섯은 아침과 저녁을 알지 못한다. 쓰르라미는 봄과 가을을 알지 못한다. 이것들은 짧은 동안 사는 것들이다.”

지적 놀이를 이어가 보자. 우리가 읽었던 스피노자의 ‘에티카’에서는 보들레르의 알바트로스 개념을 선취하고 있다. “정리 70) 무지한 사람들 사이에서 생활하는 자유로운 인간은 가능한 한 그들의 친절을 피하려고 노력한다. 주석: 나는 ‘가능하면’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비록 무지한 사람들일지라도 역시 인간이며 급한 경우에는 최선의 인간적 도움을 가져다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로부터 친절을 받아들이며 그들의 기호에 따라서 그들에게 감사하는 것이 필요하다. 친절을 피하는 데서도 우리가 그들을 경멸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도록 또는 우리가 탐욕 때문에 보수를 두려워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도록 신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그들의 미움을 피하려다가 그들을 분노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친절을 피할 때 이익과 명예를 고려해야만 한다.” (스피노자 ‘에티카’, p. 311) 어쩌면 보들레르는 스피노자의 에티카에서 알바트로스를 착안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스피노자의 날카로움이 보들레르에 박혀 통렬한 시로 표현된 것 같다. 마치 알바트로스를 스피노자가 해제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피상적 세계에서 살아가는 자유로운 인간의 모습이 흡사하다.

자유로운 인간은 없다. 조건 지어진 육체와 피와 살이 있는 한 인간은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나 오랫동안 모든 시인과 철학자의 유일한 관심사는 자유였다. 알바트로스의 날개는 하늘에서는 마음껏 날 수 있는 자유를 선사하지만, 지상에선 그 자유로 인해 살기 어렵다. 그러나 거추장스럽다는 이유로 날개를 없애면 자유의 가능성은 영원히 사라진다. 조건 안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인간, 조건을 넘어서는 인간, 보들레르와 장자, 그리고 스피노자가 꿈꾼 인간이다. 나는 어떤 인간이고자 하는가?

장재용

E-mail: dauac9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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