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April 26,Friday

이 사람을 보라

김홍빈(1964~, 산악인), 그는 열 손가락이 모두 없다.
그가 컵에 물을 따라 마실 때엔 두 손바닥을 가지런히 모아 합장해야 마실 수 있다. 신발 끈을 동여 맬 때엔 항상 누군가 매어 주어야 하고, 대소변을 볼 때엔 누군가 그의 바지 자크를 내려줘야 한다. 그도 한 때 열 손가락이 모두 붙어 있던 전도유망한 산악인이었다. 대학시절 암벽대회에서 수위 석권은 물론 노르딕, 스키, 바이애슬론까지 섭렵했던 전천후 산악인이었다.

더 없이 잘 나가던 때, 1991년 5월 북미대륙 최고봉 데날리(6,194m)에 오르며 사달이 났다. 혼자 산을 오르던 중 갑작스러운 혹한과 계속되는 악천후로 정상 직전에 정신을 잃고 조난당하고 만다.
기적적으로 구조됐으나 동상은 온 몸에 퍼진 뒤였다. 알래스카 앵커리지로 긴급 후송된 후 일곱 번의 수술 끝에 그는 발뒤꿈치가 잘렸고 열 손가락을 잃었다. 그는 순식간에 벌어진 어이없는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차라리 텐트 속에서 죽어가도록 놔두지, 정신을 차리고 난 뒤엔 원망으로 하루하루를 살았다.

절망에서 벗어나 정신이 든 다음엔 먹고 살기 위해 마음을 다잡고 운전면허, 중장비 자격증도 따봤지만 오래 가지 못했다. 죽으려 마음먹고 약국 앞까지 갔던 적이 수십 번이고 뛰어내리려 아파트 창가에 서 있기를 여러 번, 죽지 못하는 자신이 원망스러워 주저앉아 운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던 중 이렇게 살 바엔 산이라도 다시 한 번 가고 죽자는 마음을 먹고, 1997년 멀쩡한 산악인들도 하기 힘든 7대륙 최고봉 등정이라는 목표를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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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들의 도움을 얻어 열 손가락이 없어도 고산등반이 가능하다는 걸 알았고 놀랍게도 하나씩 하나씩 계획대로 등정해 나가면서 자신감은 물론 삶의 애착이 더해졌다. 2002년, 자신의 손가락을 모두 앗아갔던 북미 최고봉 데날리를 다시 오르며 7대륙 최고봉 등정을 10년 만에 마무리한다. 데날리를 다시 오르면서 트라우마를 씻어냈고 현실에 보란 듯이 승리한다. 2021년 현재 그는 세계의 지붕 히말라야 14좌 중 불과 1개 봉우리만을 남겨 놓고 있다.

그와의 인연이 있다. 나와 에베레스트를 함께한 등반 대장님은 열 손가락이 없는 그에게 맞춤형 Ice axe(빙벽을 찍으며 오를 수 있도록 고안된 등반용 피켈)를 특수제작해 선물했었다. 10여년 전 내가 에베레스트 등반을 위해 네팔에 도착해 두려움에 떨던 때, 따뜻하게 맞아주며 카트만두에서 그와 함께 저녁을 하고 두려움을 떨쳐냈었다. 그가 들려주는 인생 역정과 그가 올랐던 8천미터급 히말라야 이야기는 초자였던 나에게 용기를 주는 어떤 것이었다. 이후 그는 행사에 필요한 글이 필요하거나 장문의 연설문이 필요할 때 내게 도움을 요청했는데 나는 기꺼이 그의 손이 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에게 빙의해 글을 쓰는 게 신났었고 글은 내 손이 된 그의 손이 쓰는 듯 일필휘지 구르는 펜을 놀라워했다. 에베레스트를 다녀온 내 이야기가 첫 책으로 나왔을 때 그는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며 월간 잡지에 전화를 걸어 홍보역을 자처했었다.

지난 주, 그로부터 히말라야 8천미터 14개 봉우리 중 마지막 봉우리인 브로드피크(8,047m) 등정을 위해 파키스탄으로 떠난다는 말을 들었다. 장애인 최초 14좌 등정, 열 손가락이 없는 채로 그 험한 여정을 어찌 할 것인가. 그는 알피니스트 중에 알피니스트다. 그는 호모 사피엔스, 두려움을 최초로 지구밖으로 내다 버린 인류의 무형문화유산이 될 것이다. 그는 만년설을 향해 떠났다. 떠난다는 말은 언제 들어도 가슴 뛰지만, 떠나는 사람의 뒤통수에 대고 어떤 조건도 달아선 안 되지만, 정상에 오르지 않아도 좋으니 부디 떠난 모습 그대로 다시 돌아오라고 나는 말했다.

그에게서 위대한 후퇴를 알게 된다. 대개의 큰 봉우리를 오르기 위해서는 딱 그만큼의 깊은 내리막을 겪어야 비로소 오르막에 접어들 수 있다. 일이 잘 풀릴 때가 있는 반면, 뭘 해도 풀리지 않는 시기가 있다. 인생에 겨울은 반드시 온다. 화려했던 시기의 기쁨만큼 똑 같은 하강을 겪는다. 인생의 겨울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극한 ‘번 아웃’의 침체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한다. 우리는 인생의 겨울관리가 필요하다. 즉 자기갱생을 위한 Great depression이 필요한 것이다. 하나의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경계를 넘어야 한다.

경계를 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금 또는 오늘의 나를 극복해야 한다. 지금을 극복하는 데 오늘의 나로는 불가능하다. 우리에겐 새로운 성인식이 필요하다. 열 손가락을 모두 잃는 가혹한 일까지는 아니라도 내부든 외부로든 충격적인 자기파괴, 자기살해의 경험은 역설적으로 삶을 다시 사는 힘을 준다. 죽음을 경험한 이들이 삶에 대한 태도가 급변하는 이유는 그 어떤 가치보다 삶은 아름다운 것이라는 가치를 깨달은 데 있다. 살아 있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알고 자신의 소명을 위해 정진하기 때문이다. 내면에서 일어나는 내적 각성으로 충격적인 가치 전환이 일어날 수 있고 외부적인 충격에 의한 절망체험에서도 처지 반전은 일어난다. 이 모든 과정은 어제의 자신을 죽이고 이때까지의 삶의 관성과 결별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어쩌면 죽음의 모험은 삶 속에 포함되어 있고 그러한 모험이 없으면 삶이 아닐 지도 모른다. 나를 죽여 나를 살리는 역설의 현실을 살고 있는 나, 우리, 그리고 김홍빈. 파키스탄 브로드피크(8,047m)에서 낭보를 기다린다. 나의 악우岳友여, 정상에 오르지 않아도 좋으니 부디 떠난 모습 그대로, 머리카락 한 올도 다치지 말고 이 자리로 다시 돌아오라.

* 주) ‘이 사람을 보라 Ecce Homo’ 는 니체 저작의 제목이다.

장재용

E-mail: dauac9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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