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April 26,Friday

하노이 역사 유적지. 호아로 수용소 & 탕롱 황성 중앙부

이번 호에는 하노이시 중심가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는 유적지 두 곳을 소개한다. 우선 하노이-탕롱 황성 중앙부(Khu Trung tâm Hoàng thành Thăng Long)는 지난 2010년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기록된 유서 깊은 역사유적지이며 호아로 감옥은 프랑스 식민통치 당시 사상범을 수용하던 악명높은 고문장소다.

호아로 수용소

호아로 수용소는 인도차이나를 점령한 프랑스 정부가 베트남의 독립 인사를 탄압하기 위해 1896년에 만든 수용소(Maison Centralel)로, 독립 후에 박물관으로 탈바꿈했다. 한국의 독립 기념관, 혹은 위치로 볼 때 서대문형무소 같은 분위기다.

호아로의 어원은
Hỏa lò는 직역하면 화로, 격렬한 용광로, 지옥의 구멍 등의 의미가 있으며 이 지역 Hỏa lò거리에서 딴 이름이다. 사실상 식민시대 이전에 이곳에서 동종업을 하던 상인들이 모여 석탄 스토브, 나무 스토브를 팔곤 했다.
한편 프랑스인들은 이곳을 흔히 Maison Centrale = Central House라고 불렀는데, 이는 감옥을 완곡하게 표현한 것이다. 이후 베트남 전쟁 중인 1964년부터 1973년까지는 미군 전쟁 포로들을 수용했는데, 당시 미군포로들은 자신이 갖혔던 이곳을 ‘하노이 힐튼(Hà Nội Hilton)’이라며 냉소적인 표현을 쓰곤 했다. (F8D 조종사 Bob Shumaker가 최초로 사용)

악명 높은 정치수용소
도심지 한 가운데 두꺼운 담으로 둘러 쌓인 이곳은 식민지배자들이 자신의 통치체제에 반항하면 어떤 결과가 온다는 것을 시각적으로 확실히 보여주기 위한 곳으로 시대적 아픔인 식민지의 비애를 간직한 슬픈 곳이다.
즉, 하노이 내 프랑스인 관할구역에 세워진 이 수용소는 주로 독립운동을 하던 정치범들을 가둔 후 고문하고 처형하던 악명높은 곳이다. 1913년에 개보수를 거쳐 기존 460명 규모에서 600명 규모로 확장되었는데, 날이 갈수록 더 늘어 1916년 730명, 1922년 895명, 1933년 1,430명, 1954년 2,000명까지 수용해 지금도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는 식민착취의 상징적 장소로 기억되고 있다.

민중계몽과 독립사상의 요람
이 수용소는 특히 도심 한 가운데 위치했던 관계로, 당시 죄수들이 감옥 창살밖으로 담배 아편 등을 던졌는데 그 속에 독립사상이 담긴편지가 숨겨져 있었고, 그것이 행상인들에 의해 민중에 전달되는 등 정치사상과 이념의 요람이 되기도 했다.

다양한 용도 변경
한편 1954년 제네바 협정 이후 공산당이 이곳을 장악하면서 부터는 혁명사상과 활동을 교육하는 장소로 쓰였으며, 월남전쟁 당시인 1964년 5월 Everett Alvarez Jr. 등 미군포로들이 비위생적 환경 속에서 최악의 음식을 먹으며 포로생활을 했다.

한편 지난 1990년, 감옥은 철거되었지만 게이트하우스는 박물관으로 남아있으며, 독립운동가가 갇혔던 독방을 비롯해 고문 기구 등을 그대로 남겨 전시하고 있다. 호아로 수용소 안뜰에서 위를 쳐다보면 수용소 위로 높이 솟은 탑하노이가 있다.

호아로 수용소 찾아가기

호안끼엠 호수 남쪽에서 걸어서 15분
입장시간 : 8:30~11:30,13:30~16:30/월요일 휴관
입장료 : 10,000동


탕롱 황성 중앙부

하노이는 역사적으로 오래된 도시지만 끊임없는 외침속 역사적 자취를 찾기가 쉽지 않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얼마남지 않은 황성이야 말로 지난 천여년간의 역사를 간직한 소중한 베트남 문화유산이다.

위치
하노이-탕롱 황성의 중앙부(Central Sector of Imperial Citadel of Thang long – Ha Noi)는 약 20헥타르의 면적을 차지하는데, 이곳에서는 호앙지우(Hoang Dieu) 18번가 유적지를 비롯해 박몬(Bac Mon), 도안몬(Doan Mon), 하우 라우(Hau Lau), 낀티엔 궁(Kinh Thien Palace) 의 용 조각상, 용의 집, D67 번지 가옥, 하노이 깃발 탑(Hanoi flag tower) 등 다양한 하노이 성채(Hanoi Citadel)의 유물들을 만나볼 수 있다.
*위치적으로는 북부의 판딘풍, 남부의 딩빙푸, 동부의 윙찌풍, 서부의 호앙지우 등, 총 4개의 각기 다른 도로가 이 유적들을 둘러 싸고 있다.

역사
리 꽁 우언(Lý Công Uẩn) 왕은 1009년 리왕조를 설립한 후, 1010년 7월에 수도를 호아르(Hoa Lư (Ninh Bnh))에서 다이 라(Đại La; 지금의 탕롱) 성채로 옮긴다는 칙령을 선포했다. 수도 이전 후, 그는 탕롱 성채를 짓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1011년에 완공되었다. 탕롱 성채는 세 개의 요새로 이루어져 있는데, 가장 바깥쪽에 있는 요새는 일반 주민들이 거주했던 낑 탄(Kinh thành, 제국 도시)으로, 홍(Hong), 또 릭(To Lich), 낌 응어(Kin Nguu) 강에 둘러 쌓여 있었기 때문에 수도의 배수로 역할을 했다. 이 곳 중심부에 위치한 두 번째 요새인 호앙탄(Hoàng thành, 황성)에는 궁과 사옥들이 자리잡고 있었으며 고위 관료들이 거주했다.

그리고 탕롱 황성 가장 안쪽에 위치하며 가장 작은 규모였던 장소는 바로 자금성이라고 불리었던 뜨껌탄(Tử Cấm thành)인데, 이곳에서는 왕과 여왕을 비롯해 여러 명의 첩들이 생활했다.

탕롱 성채는 쩐왕조(Nhà Trần) 시기에 여러 번의 보수 작업을 거쳐 레왕조(nhà Lê)시기에 더욱 확장되었지만, 1516~1788년 간 막(Nhà Mạc)과 레쭝훙(Lê trung hưng) 왕조 시기에는 여러 번 파괴되었으며, 1789년 초, 꽝쭝(Quang Trung) 왕이 당시 수도를 푸쑤언(Phú Xuân)으로 이전함에 따라 탕롱 성채는 단지 북쪽의 방어시설(Bắc thành)로 사용되었다.

한편 윙왕조(Nguyễn) 시기에는 탕롱 성채에 남아있던 성채의 일부 건축물이 새로운 성채 건축을 위해 푸쑤언(Phú Xuân)으로 옮겨졌는데, 이에 따라 낀티엔(Knh Thiên)궁전과 하우라우(Hậu Lâu)만이 윙왕조의 왕들이 이곳을 방문 시 머무르는 곳으로 남게 되었다. 1805년 쟈롱(Gia Long) 왕은 탕롱 성채를 둘러싸고 있는 벽을 허물고, 그 대신 프랑스 건축양식인 보방(Vauban)을 따라 작은 규모의 하노이 성채(Thành Hà Nội)를 지을 것을 명했고, 1813년(Minh Mạng)왕은 탕롱 성채의 이름을 하노이성이라 칭하며 이곳에서 행정개혁을 시행했다.


이후 프랑스는 인도차이나반도를 점령하면서 하노이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연합(French Indonesia Union)의 수도로 정하였으며, 하노이 성채는 프랑스 식민군의 기지를 만들기 위해 파괴되었다. 하지만 1954년 베트남 군대가 수도를 다시 차지하면서, 하노이 성채는 베트남 국방부의 본부로 떠올랐다. 이처럼, 하노이 탕롱 황성의 중앙부는 탕롱 시대 이전의 다이라(Đại La) 요새 시기부터 오늘날까지 약 10세기가 넘는 역사를 잘 간직하고 있다.

고고학적 가치 인정받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
탕롱 황성은 오랜 역사를 통해 많은 변화를 거듭하였는데, 금지된 도시(Forbidden City) 를 비롯한 자금성(Tử Cấm Thành)등 황성의 중심부는 지금까지도 그대로 남아있다. 한편 황성 내부의 건물 구조는 여러 차례의 재건축을 통해 바뀌었는데, 호앙지우(Hoang Dieu) 18번가 유적지에서 발굴된 여러 층의 건물 잔해와 건축 유물들이 이를 증명해준다.

즉, 이러한 흔적들은 건축을 활용하여 시행했던 당시의 도시 개발 프로젝트들과 여러 왕조를 통해 계승되었던 탕롱 성채 건축 역사를 명백하게 보여주는데, 이는 현 하노이 탕롱 황성 중심부가 지니고 있는 흥미로운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고고학자들은 이곳에서 여러 단계의 발굴 작업을 거쳐 탕롱 황성 시대에 쓰여졌던 다수의 도자기 유물을 발견하였다. 이 계기로 많은 학자들이 각기 다른 왕조 때 탕롱 황성에서 제작되었던 도자기들을 연구할 수 있게 되었다. 아울러 탕롱 황성의 건축 유물들은 그 당시 존재했던 높은 문화적 수준과 경쟁력을 가늠하게 하는 역사적 잣대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이 곳에서 발견된 중국, 일본, 서아시아의 자기와 청동 동전들은 탕롱이 문화교류의 중심이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지난 2010년 7월 10일 (오후 8시 30분) 브라질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회의에서 하노이 탕롱 황성의 중심부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문화적 깊이, 문화 중심지로서의 지속적인 역할의 가치, 다양하고 풍부한 건축 등의 기준에 탕롱 황성이 지니고 있는 역사적 유물로서의 가치가 거듭 인정되었다.

그 결과 지난 2010년 10월 1일 탕롱 1,000주년 기념행사에서 이리나 보코바(Irina Bokova) 유네스코 총장이 하노이 대표자들에게 세계문화유산 등재 증명서를 수여하면서, 하노이 탕롱 황성의 중심부는 역사적인 날을 기록하였다.

깃발탑(Cột cờ ; flag tower)
20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하노이 깃대는 하노이에 있는 타워로 높이 33.4m (깃발포함 41m)이다. 윙왕조 시대Vauband성, 즉 프랑스식 건축양식을 본 따 7년간의 공사기간을 거쳐 1812년에 완공되었다. 3개의 단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탑 내부는 54개의 나선형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8각형 깃발탑 꼭대기 각 벽마다 창문있으며, 반대편 계단끝에는 제단이 설치되어 있다.

TIP 황성 관람 포인트

깃발탑에서 나와 왼쪽으로 걸어가면 황성 입구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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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안문 : 중앙에 도안문(단문)이 있고, 그 위에는 망루가 있는데, 단문을 지나 계단을 올라가면 오문루에 이른다(망루 중간에 있음)
망루뒤 정원 : 현재 프랑스식 건물이 보이는데, 본래는 경천궁 등 황궁의 주요전각이 있던 자리로, 지난 1886년 프랑스군 침략시 소실되어 지금은 용 조각과 돌계단만 남아 있다.
공주전각 : 정원 뒤에 있다. 윙가의 왕이 하노이로 올 때 첩과 시녀가 묵던 곳으로, 후루의 전각은 비교적 잘 보전되어 있다. 단, 프랑스 군이 점령시 원형이 파괴되어 현재의 모습은 다소 개조되었다.
북문 윙 : 왕조시대 유일하게 보존된 성문으로, 정면에 정북문이라 적혀 있다. 1882년 프랑스군과 전투시 파괴된 흔적이 곳곳에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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