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August 5,Thursday

한국 역사탐방, 첫번째

베트남과 한국의 시련과 극복

우리 문화는 어떻게 정착되고 지금의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을까?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베트남은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의 문화를 가지게 되었을까? 특정 국가의 문화는 역사발전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데 지금부터 추적을 시작합니다. 지금부터 700년 전 우리나라는 성리학(주자학) 유입으로 과거와 다른 문화를 체험했고 계속 발전하여 정착하게 됩니다. 5,000년 역사 전부 의미있고 소중하지만 700년 전 부터 우리문화는 조금씩 방향을 바꿔가고 있었던 것이죠.

그리고 베트남은 약 700년 전 엄청난 국가 시련을 극복하고 자부심을 가지게 되는 계기를 마련합니다. 베트남 사람의 자존심 출발을 알리는 역사적 사실을 추적합시다. 그러면 지금부터 저와 함께 700년 전 베트남 여행을 떠나 볼까요? 그리고 고려도 함께 갑시다!

고려에 성리학이 유입되던 13세기 말 베트남에도 국가 운명을 좌우하는 사건이 벌어지는데 바로 몽고의 침략입니다. 몽고는 3차례 베트남을 침략했는데 1257년 발생한 1차 침략의 이유는 남송 정복을 위해 베트남을 먼저 정복하여 남쪽 교두보를 확보한 후 남북 양면 공격으로 남송을 멸망시키려고 베트남을 침략합니다. “경적필패” 베트남을 야만국가로 보고 3만 군대로 베트남을 침략한 몽고군대는 홍강을 타고 북상했으나 식량부족, 1월의 추위, 베트남 지리에 어두운 점등 전쟁 수행이 불가능해져 휴전을 맺고 철군합니다. 그 후 몽고는 남송 침략에 전념하고 1279년 남송을 멸망시킨 몽고는 중국 전역을 장악하고 6년 후 1285년에 베트남을 다시 침략합니다. 이때도 몽고는 일본 원정과 남송의 잔적 소탕등 내부의 문제가 많은 상태에서 무리한 베트남 원정을 감행합니다. 15만 몽고군은 세방향으로 베트남을 공격하여 수도 탕롱(하노이) 점령 등 많은 지역을 점령하고 베트남군을 압박했죠. 그러나 8월의 무덥고 습한 하노이 날씨와 풍토병, 베트남 군대의 유격전과 장기전에 굴복하여 철군합니다.
당시 세계 최강의 몽고는 베트남 원정에 두번씩이나 실패하여 무척 자존심이 상했는지 복수 혈전의 3차 침략을 감행합니다. 앞서 두번의 실패를 씻으려고 1287년 30만명의 군사와 500척의 군선에 17만석의 군량미를 준비하여 제1군은 운남을 출발하여 홍강으로 향하고, 제2군은 광서를 출발하여 랑썬으로 향하고 수군인 제3군은 광동을 출발하여 박당강으로 진격합니다. 당시 베트남의 쩐 왕조의 인종은 항복을 고려했으나 쩐 흥 다오 장군은 “항복하려면 신의 목을 먼저 베소서 그리고 싸워서 진 후 항복해도 늦지 않습니다”라며 항전을 주장했고 유명한 격장사문을 지어 장병들의 투지를 일깨우죠. 그런 와중에 몽고의 제1군과 제2군은 순식간에 수도 탕롱과 반 끼엡을 점령하고 박당강을 거슬러 오는 보급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쩐 흥 다오 장군의 격장사문으로 인해 전의를 불태운 베트남 군대는 30만명 몽고군의 식량 17만섬을 싣고 오는 몽고의 선박 100척을 화공으로 섬멸합니다. 먹지 않고 싸울 수 있는 군대는 없죠. 베트남 군대의 매복에 걸려 군량미를 잃은 30만 몽고 군대는 철수를 결정하고 육군은 육로로 철군하고 수군은 400척의 배를 동원하여 철수합니다. 미리 강 바닥에 말뚝을 박고 강가에 염초와 기름, 작은 배를 준비한 쩐 흥 다오의 작전에 걸린 몽고 군대는 거의 전멸하고 수군제독 오마니 이하 많은 장수들이 생포됩니다. 물론 육로로 철수하던 육군도 매복에 걸려서 살아 돌아간 몽고군은 열에 하나라고 합니다.
몽고의 2차 침략과 3차 침략을 물리친 쩐흥다오는 베트남 사람의 자존심입니다. 육전에서는 지형지물을 활용하고 수전에서는 조수간만의 시간을 이용하고 강 바닥에 설치한 말뚝에 걸린 배를 화공으로 섬멸하여 베트남 군대의 피해를 최소화 시킨 그의 전략은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 군대를 물리치고 1979년 60만 중국군을 물리친 보구옌잡 장군의 3불 전략으로 계승되죠.

[ 3불전략 ]

① 적이 원하는 방법으로 싸우지 말라.

② 적이 원하는 장소에서 싸우지 말라.

③ 적이 원하는 시간에 싸우지 말라.

“송곳 꽂을 땅도 없다”라는 속담을 들어 보셨죠? 이말은 700년 전 몽고와 베트남이 전쟁하던 시대, 우리역사의 고려시대 권문세족에게 농토를 빼앗긴 농민들이 신세를 한탄하는 소리였습니다. 한문으로 표현하면 “입추의 여지가 없다”인데 요즘은 의미가 확장되어 공연이나 강연 등 참석 인원이 꽉 차서 더 참석할 공간이 없다는 의미로도 쓰입니다. 당시 고려는 내우외환에 시달리고 있죠. 즉 왜구의 침략과 몽고의 수탈 그리고 고려 권력자들의 부패와 타락 때문에 더 이상 희망이 없는 국가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암담한 시대에도 희망을 설계하는 젊은 왕자 왕전(충숙왕의 둘째 아들)은 고려의 독립과 개혁을 꿈 꾸지만 번번히 왕위 계승에서 탈락합니다. 당시 고려는 몽고의 속국이라 원 황제의 지명을 받아야 고려왕 즉위를 할 수 있는데 왕전의 어머니는 몽고여인이 아니라 고려여인(충숙왕의 후궁)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원 황제의 지명을 받기 어려웠죠. 젊은 왕자 왕전은 자신을 수행하던 고려 신하들을 시켜 원 황실의 실력자 위왕에게 접근하여 거래를 시도합니다.
“당신의 딸을 주면 고려 왕비로 만들고 평생 사랑하며 살겠소”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 왕전은 위왕의 딸 노국공주를 아내로 맞이하고 장인의 도움으로 고려 31대 국왕이 됩니다. 세기의 사랑으로 알려진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사랑은 이렇게 정략결혼으로 시작 되었습니다.
“마누라가 예쁘면 처가집 말뚝 보고도 절한다”라는 말이 있죠.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남편의 지극한 사랑에 보답하고자 노국공주는 친정 몽고를 배반하고 시댁 고려의 독립을 지원합니다.
1351년 공민왕은 만 21세의 젊은 나이에 제 31대 고려국왕에 책봉되어 조국 고려로 돌아옵니다. 공민왕은 10년간 북경에서 볼모생활을 하며 원나라의 내부를 분석한 몽고통 입니다. 게다가 아내 노국공주의 협조를 받아 실시간 몽고 분석이 가능했죠. 이러한 정보를 바탕으로 공민왕은 즉위 후 곧 몽고의 제도와 복장 변발등 일체의 몽고풍을 폐지하고 고려의 풍속으로 환원시킵니다. 그리고 5년 후 1356년,일제의 총독부 기능을 하던 정동행성과 그 산하기관인 정동행성 이문소(치안부서) 를 해산시키고 몽고 관리들을 참살 혹은 추방시킵니다. 또한 이자춘과 아들 이성계의 도움을 받아 몽고가 고려 영토를 직접 지배하던 쌍성총관부(지금의 함경남도)를 공격하여 수복합니다 고려의 자주권을 전부 회복하는 역사적인 순간입니다.

다음 이야기 “공민왕의 개혁정치와 그 주역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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