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September 25,Tuesday

노동의 변천과 역사

베트남의 몇 안 되는 공휴일 인 5월 1일 노동절, “무슨 날인지 잘 모르지만 말 그대로 노동자의 날이고, 일단 휴일이라 좋은게지”하는 정도의 느낌이 일반 대중들이 갖고 있는 이날의 의미라 생각된다.
그러나 이곳, 베트남으로, 보다 양호한 조건의 노동력에 매력을 느껴 진출하신 분이라면 노동절은 각별한 의미의 날이 되어야 함이 마땅하다.
마침 몇 분의 독자가 노동절의 의미에 대한 질의를 하셔서 이번 호에서는 그 분들 요청에 따라 노동절의 유래와, 노동이라는 가치의 시대적 변천과 그 역사를 살펴보는 특집을 마련했다.

노동절, 메이데이의 유래와 노동자 단체, 인터내셔널의 등장
5월1일은 「노동절」이다. 이날을 흔히 「메이데이」라고 부르며, 전세계 90여개 국가에서 국경일로 지정된 이날의 유래는 미국 시카고에서 시작된다. 이 메이데이의 유래를 각 미디어에서 찾아보면,
<1886년 5월1일 시카고에서 당시 하루에 16시간 노동을 하던 근로자들이 8시간 노동을 주장하면서 파업을 일으키자 경찰이 발포해서 소녀 1명을 포함한 근로자 6명이 사망했다. 다음날 이에 항의하기 위해 노동자 30만 명이 시카고 시내의 헤이마켓 광장에서 집회를 가졌는데, 누군가 폭탄을 투척해서 아수라장이 됐다. 법원은 그 책임을 물어 파업지도자에게 사형을 선고했으나, 차후 이 사건의 기획자가 자본가이었음이 드러났다. 이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5월1일을 메이데이로 정했다> 라고 주로 설명한다.
노동절(메이데이) 탄생을 주도한 곳은 인터내셔널이라는 단체인데, 이 단체는 시위가 생기기 22년전인 1864년 영국의 런던에서 조직된 것으로 정식명칭은 국제노동자협회(International Working Men’s Association)로 노동자 중심의 최초 국제적 조직이다.

이 단체가 창설된 배경은 다음과 같다.
이 단체는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권리향상을 위한 정치화가 필요하다는 점을 이해했으나 투표권이 제한되었기에 대표성을 가지지 못한 노동자와, 당시 새로운 대중정치세력으로 등장하여 대중화를 통한 제도권 정치 진출이 필요했던 사회주의자들이 연합하여 노동자의 권리쟁취와 사회변혁을 목적으로 설립된 정치적 조직이라고 볼 수 있다. 인터내셔널에 이론적 기초를 제공한 사람이 칼 마르크스와 그의 동료 프리드리히 엥겔스였다는 것을 봐도 이 조직의 정체성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1차 인터내셔널은 정부 당국의 탄압과 마르크스와 조직원간 내부갈등으로 인해 정상적으로 가동되지 못한 채 1876년 해산된다. 그 후 2, 3, 4, 5차 인터내셔널이 생겨나면서 이 시기의 인터내셔널은 제1차 인터내셔널로 불리게 된다.
제 2인터내셔널은 1889년 7월 14일 프랑스혁명 100주년 기념일에 파리에서 설립됐다. 당시 마르크스주의가 세계적으로 노동운동의 주류를 차지하고 있던 시대 상황에서 제 2인터내셔널은 세계 노동운동의 확대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제 2인터내셔널은 1914년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 해산되는데, 제 2인터내셔널은 1889년 5월 1일에 국제 노동절을 선포한 것과 1910년 3월 8일에 여성의 날을 선포한 것으로 유명하다.(두산 백과 참조)
일단 이것으로 노동절의 유래와, 그 기념일을 제정한 단체를 살펴 봄으로서 노동절이 갖는 정치사상적 배경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노동은 노예로부터 시작되고, 세습되었다.

노동은 인류 역사에서 ‘강제성’과 함께 작용한다.
19세기 영국경제학자 Alfred Marshall은 노동력을 상품으로 보고 그 특성을 제시하며, 노동력은 판매되나, 인신은 판매되는 것이 아님에도 노동력과 노동자가 분리될 수 없다는 상호모순으로 인해 노동문제가 발생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짚은 이 문제, 노동과 인신의 분리가 바로 지금까지 인류가 겪은 노동문제의 본질이라고 볼 수 있다. 인류의 역사를 살펴보면 예로부터 노동력을 제공하는 자의 신분은 자유롭지 못했고, 속박의 연속이었다. 인류 노동투쟁의 궁극적 목적은 바로 노동력과 인신을 분리하기 위함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19세기 초반까지 노동력=노예로 귀착되는 인식이 전 세계적으로 인정되는 보편적 노동력의 전부였다고 볼 수 있다. 2015년 현재 기준으로 전 세계 노예비율은 평균 0.25% 정도로 추정되지만,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 아테네 같은 경우, 자유민 1: 노예 20 정도의 비율이었으며, 동양의 중국도 당나라 시대까지는 약 50%이상의 인구가 노예와 비슷한 신분으로 추정됐다. 이러한 상황은 조선도 마찬가지로, 조선 중반 숙종시기에는 최대 40%인구가 노비 혹은 그에 준한 천민으로 취급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직업선택의 자유라는 관념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19세기까지는 전 세계적으로 모든 사회신분 및 직업이 자손에게 세습되는 것은 거부할 수 없는 사회적 제도였다. 요즘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직업선택의 자유, 이동의 자유 등의 권리들도 노동과 관련 깊으나, 대부분의 인류 역사에서는 이런 자유가 전세계적으로 일반인에게는 제공되지 않았다.
즉 200여년 전까지 인류에게 노동이란 여전히 기본적인 신체의 자유가 억제된 강제성이 동반된 노동이 보편적이었다.
그러면 이렇게 시작된 노동의 강제성은 어떠한 방식으로 변화되어 지금에 이르렀을까?

농노제의 등장, 소유의 자유와 책임의 굴레
노예로 인해 제공되던 노동시장의 변화가 시작된 것은 로마시대에 들어서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강제형태의 노동이 대부분인 당시에는 인구가 현대사회처럼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지 않으므로 노동력 역시 일정량이 그대로 유지되거나, 줄어드는 경우가 많았다.
유럽의 경우 로마제국의 확장이 멈추고, 기원후 200여년경부터 제국의 쇠퇴가 시작되면서, 노예제가 약화되기 시작한다. 이런 변화는 로마의 정복전쟁이 중단되면서 정복지에서의 노예수급이 끊어진 데서 기인했다. 즉 예전 같으면 말 안 듣는 노예는 죽이고 새로운 노예로 대체하면 그만이었지만. 정복전쟁이 중단된 상황에서는 한정된 수의 노예를 최대한 효율적으로 활용해야 했다. 이에 따라 근로 동기 유인책이 필요해진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예수급의 중단에서 오는 자원의 감소를 해결할 방법이 없자, 결국 경제적으로 몰락한 자유민이 사실상 노예의 자리를 대체하게 된다. 즉 노예와 자유민의 중간형태인
‘농노’가 탄생하기에 이른 것이다.
로마시대 말기, 이민족의 침입과 이로 인한 치안의 불안은, 로마 경제가 상호무역을 중심으로 한 경제에서 자급자족의 경제로 전환을 촉진시켰고, 결국 농노제의 확립을 가속화시킨다.
농노의 경우, 인신자유가 제한되는 강제성은 노예처럼 유지되었지만, 농노는 뭔가를 자신의 것으로 소유를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노예와 차이를 보였다. 즉 제한적 농산물 축적 및 가족형성을 허용함으로써 노동동기를 늘리는 방식으로 생산성을 높였고, 농노의 매매를 금지함으로써 신분이 상승되었다. 이러한 지위의 승급을 통한 보호와, 사유재산의 강화를 통한 자율성 제공의 방식은 추후 역사에서 보이는 노동 강제성 제거의 특징이기도 하다.

농노제의 붕괴
이러한 농노제는, 약해진 노예제와 더불어 봉건제도로 알려진 중세 유럽의 경제적 기반이었으나, 11세기 이후 십자군 전쟁과 흑사병으로 쇠락을 맞게 된다.
십자군 전쟁은 영주의 무력기반인 기사 수를 감소하게 만들고, 병사로 동원된 농노들이 전장에서 사망하거나 시골로 돌아오지 않고 도시로 대량 유입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로 인하여 도시로 유입된 농노들은 기능인으로 전환되며 노동시장의 변화가 시작된다.
농노제에 결정적 타격을 준 것은 흑사병으로써, 14세기에 흑사병으로 인해 유럽인구의 30~50%가 줄어 들면서 농노제의 근간인 장원제도가 완전히 무너지게 된다. 흑사병의 피해를 입지 않은 러시아를 제외하고는 유럽의 모든 농노제는 몰락하게 되며, 몰락한 농노들이 도시의 자유민으로 유입되면서 상공업 발달의 촉매제로 작용한다. 이때 도시 거주 기능직을 중심으로 길드(조합)가 형성되면서 최초로 근대적 의미의 노동시장이 등장하기 시작하며, 이 길드들은 일부는 근대적 상공업 협회로 발전하지만, 일부는 노동조합의 시초가 된다.

산업혁명과 노동운동 (인신의 속박에서 해방되기 위한 노력)
14~15 세기에 이르러, 농노제의 붕괴로 더 이상 영주의 속박도 없었고, 즉결처분도 사라진 고용 노동에 대한 새로운 관념이 생기면서 노동은 인신과 분리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시작된 상공업 발달은 도시로 대량 인구가 유입되는 근대적 도시화를 부르고, 이런 인구 유입은, 유럽 도시의 임금하락으로 이어져 노동조건, 생활 수준이 악화되는 결과를 가져오고, 추후 노동조합의 결성과 노동문제의 정치화 라는 결과를 낳게 된다.

산업혁명 초창기까지 사용자(자본가)들은 노동자에게 휴일과, 정해진 근로시간 없이 불규칙하게 장시간 노동을 할 것을 강요했다. 이로 인해 급여의 액수와 상관없이 노동자들의 삶은 이전보다 궁핍해 졌다.
특히 산업화 초기 19세기 고용주들은 노동자들의 고용과 해고를 자유롭게 할 수 있었으나. 노동자에게는 결사의 자유가 없었기에 가혹한 노동조건의 개선을 요구하거나 불만을 표하는 등의 항의 수단은 애초 없었다. 이런 시대상황의 반발로 점차 노동자들이 상호부조를 목적으로 하는 협동조합의 형태로 초기 노동자 단체를 만들기 시작한다.
산업의 발전에 따른 노동자의 증가는 점차 노동조합의 세력 확대를 불러왔고 이에 따라 각지에서 권리 확보를 위한 집단행동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결국 몇 차례 법적 투쟁을 거처 1824년 영국에서 최초로 노동조합이 법적 지위를 인정받는다. 그리고 이 흐름으로 대부분 유럽국가에서도 노동조합의 합법화는 순차적으로 진행된다.
그러나 19세기 폭발적인 유럽의 인구성장은 노동력 가격이 낮게 유지되는 상황을 지속시키며 다수의 유럽시민들은 절대 빈곤과 장시간 노동의 굴레에서 벗어 나지 못하는 노동계급의 절대 빈곤 시대를 야기한다. 당시 자본가는 노동자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지는 않았지만, 노동자에게는 일을 못하면 굶어 죽는다는 빈곤의 절박함이 어느 때보다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된다.

노동운동의 정치화와 자본주의의 대중화
이런 시대적 빈곤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일환으로 마르크스의 자본론, 뒤르켐의 자살론 등 유명한 이론들이 등장한다. 결국 이런 사회과학 이론들이 기반이 되어 노동운동은 이념을 지닌 정치운동으로 진화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초기 노동운동에서는 ‘사회주의 운동’같은 사회변혁 목적이 아니라, 조건이 부재한 노동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노동자의 자체 권리 확보가 그 운동의 중요한 목적이었다.
특히 8시간 근로시간 같은 조건 개선 운동은 19세기 노동운동의 동력이요, 다수의 대중을 이끄는 힘이었다. 19세기 말 투표권 확대를 통해 노동문제가 정치적인 이슈가 되면서 노동을 매개로 한 정치 세력인 노동자 정당들이 등장하면서, 노동은 20세기 내내 새로운 정치적 갈등, 노동자와 사용자의 이익 상충에 의한 이념적 갈등을 야기한다.
이러한 갈등은 새로운 노동자의 권리를 향상하는 제도 도입을 불러왔고 이에 따라 노동자의 주택보급, 사내 주주제 등의 노동자를 상대로 한 동기 부여책이 확산 되면서, 아이러니 하게도 자본주의의 대중화를 이끄는 역할을 하게 되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1889년 제정된 5월 1일 국제노동절은 인류의 오랜 역사를 통해 투쟁. 획득한 노동과 인신의 분리가 완성되었음을 선언하고, 동시에 하루 8시간 근로를 인류의 보편적 일일 노동의 기준으로 만든 날이라는 데 그 의의를 갖는다.
(한성훈 : kosdaq62@gmail.com)

참고문헌
Scheidel, Walter. “The Roman Slave Supply.”
The Cambridge World History of Slavery
Thompson, Willie. Work, Sex and Power: The Forces That Shaped Our History. London: Pluto Press, 2015.
Marx, Karl, Friedrich Engels, Friedrich Engels, and Paul M. Sweezy. The Communist Manifesto. New York: Monthly Review Press, 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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