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April 27,Saturday

‘그리스 비극’ 에 관하여

인류라는 종種의 전개는 강물처럼 흐른다. 부풀었다 터져버리는 작은 거품이 개인이요, 같이 흘러가는 강물의 대열이 동시대를 사는 인간이다. 시간은 늘 인간을 밀치고 자신의 길을 간다. 생각해 보면 산다는 것에 대해 대단한 의미를 부여할 것도 없는 것 같다. 인간의 삶은 굽은 물길을 돌고 돌아 기묘하게 전진하니까. 모두 태어나 죽는다는 불변의 조건 안에 사는 같은 운명이다. 동양이든 서양이든 다르지 않다. 동시대를 사는 인간은 동서東西를 막론하는 하나다. 우리는 동양과 서양을 구분하려 들지만 자연에는 이분법이란 건 애초부터 없었으니 나누고 자르고 구분하는 일은 인간의 버릇이다. 이제라도 같이 섞고 합하여 한데 녹이는 일이 필요하겠다. 대서양과 태평양을 넘나드는 시도를 멈추지 않는 이유다. 관자에서, 같은 시간 유라시아를 건너 그리스로 날아가면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에게 해에 봄날 햇살이 난반사한다. 바다는 들뜬 계절처럼 거대하게 출렁인다. 사람도 들뜬다. 바다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지어진 원형 극장으로 사람들은 모였다. 끈으로 감긴 신발을 신고 흰 천이 덮인 옷을 한 손으로 움켜 잡으며 삼삼오오 모여 싱거운 이야기를 나눈다. 아이스킬로스 (Αἰσχύλος BC 525~BC 456)가 새 연극을 상연하는 날이다. 신예 작가 소포클레스(BC 496~BC 406)에게 연극제 수상의 영예를 번번이 빼앗겨 회심의 역작을 올린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오이디푸스 왕’으로 일약 스타 작가로 등극한 소포클레스의 인기는 대단해서 아이스킬로스는 늘 절치부심했던 것이다. 연극이 시작하기를 기다린다. 웅성거리는 소음이 잦아들 무렵, 드디어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Prometheus desmotes) 가 등장했다. 더러는 자지러지며 웃기도 더러는 눈물을 훔치기도 하며 배우들의 노래와 연기에 온 마음을 이입하며 사람들은 하나가 된다. 그리스의 봄날은 그렇게 깊어 간다.

기원전 4세기에 만들어졌다는 디오니소스 극장의 수용 인원은 1만 4천 명이다. 마이크가 없고 음향 시설이 전혀 없던 때, 1만 4천명이 동시에 관람할 정도라면 연극 배우의 성량은 얼마나 컸어야 했던가. 배우들은 아크로폴리스 공연장에서 두 눈을 찌르며 고뇌했던 오이디푸스를 공연했을 테고 신을 거역하고 인간을 도운 프로메테우스를 연기했을 테다. 3대 비극 시인(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의 작품처럼 ‘문학적 가치가 높고 어려운 것을 매일 세 가지씩 본 아테네의 관람객은 상당한 취미의 소유자들이었음이 틀림없다.’ 돌무더기 좌석에 지나지 않는 유적에도 감흥을 느끼기에 충분하지만 1만 4천 명의 관람객 앞에서 외쳤을 소리의 유적을 더하면 그것은 감동으로 다가온다. 그리스 비극은 이렇게 탄생했고 지금껏 살아 있다.

무대에서는 온갖 비극과 패륜, 슬픔과 협잡이 난무한다. 칼에 찔려 피가 흥건해 지는가 하면 낯 뜨거운 불륜으로 결국 파멸에 이르기도 하고, 작고 약한 자가 마침내 강자를 물리치고 승전보를 울리기도 한다. 인간이 신과 대결하기도 하고 신은 인간을 죽이기도 또 살리기도 하며 화해와 반목을 거듭한다. 니체는 자신의 저서 ‘도덕의 계보’에서 그리스 비극을 두고 ‘잔인성이라는 향료’로 신에게 바치는 일종의 ‘축제극’이라 말하며 ‘비극은 하나의 예술이요 쾌락이다. 무대 위의 흥건한 피는 그것을 보는 사람의 몸과 마음을 화끈하게 정화시켜준다.’고 짚었다.

숨도 못 쉴 정도로 간이 콩알만 해지게 만들었다가 그 다음 순간이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가슴을 툭 트이게 하는 식의 짜릿한 서스펜스를 선사하는 줄거리는 여전히 매력적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게 어떻게 무대에서 전개되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 극은 간략하게 말하자면 대화 부분과 노래하며 춤추는 코러스 부분으로 이루어져있다. 주로 연극은 마지막 절정 부분 (엑소도스)에 초점을 맞추어 배우가 연기하므로 선행하는 줄거리를 작가가 직접 관객 앞에서 알리고 설명한다. 또 중간 중간에 무대로 올라가 지금의 연극은 이야기 속의 어느 부분을 다루는가를 설명하기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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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들은 하루 종일 앉아 있기 때문에 좌석에 쿠션을 깔았으며 술이나 먹을 것을 충분히 준비해’ 오기도 했다. 냉정했던 ‘관람객들은 배우가 서투르면 먹다 남은 마른 과일을 집어 던졌다. 배우나 연극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고함을 지르고 좌석을 발로 구르다가 결국은 배우를 무대에서 쫓아버려 극의 상연을 중지시’키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이와 관련해 프랑스 인문학자 ‘앙드레 보나르’는 ‘정치적 평등을 위하여, 사회정의를 위하여 오랜 세월 싸워온 경험이 있기 때문에 그리스 비극은 관객들과 코드가 맞는다. 영웅이 운명과 대적하는 얘기가 대중들의 입맛에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투쟁의 장에서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가 맞서고 있다. 토지와 돈을 소유한 사람들은 힘없는 사람들을 빈곤으로 내몰고 공동체 전체를 와해할 기세다. 하지만 그 반대편에는 사람들 간의 평등을 추구하고 사람들 간의 연대를 중시하며 공동체의 번영을 꿈꾸는 가난하지만 용감한 사람들이 있다.’고 진단했다. 연극과 연극을 보는 행위를 통해 시민의 실제적인 민주주의가 다듬어 지는 성소聖所 역할을 했다고 보는 것이다. 때문에 작가들은 거룩한 성수나 멸균 처리된 밍밍한 물로는 비극을 쓸 수 없었다. ‘비극은 눈물과 피로 쓴다.’ 그리스 비극이 2천 5백년이 넘게 살아 있는 이유일 테다.

그리스 비극을 조금 이해한 듯 하다. 다음 호에서는 그리스 비극에서 가장 찬사를 많이 받았다는 아이스킬로스의 작품 ‘아가멤논’과 ‘오레스테이아’를 소개한다. 아가멤논은 트로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그리스 연합군의 수장이었다. 오랜 전쟁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으나 아내의 정부情夫에게 죽임을 당한다는 이야기다. 오레스테이아는 아가멤논에 이어지는 이야기로, 아버지 아가멤논을 죽인 어머니의 정부 아이기스토스와 그를 사주한 어머니를 죽이게 된 아들의 비극적인 이야기다. 아버지를 죽인 어머니를 아들이 단죄할 수 있는가, 정당한 패륜이라는 게 존재하는가, 인간은 어디까지 잔악할 수 있는가, 살인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어디까지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인가, 신은 이런 인간의 세계를 어떻게 판단할까, 하는 인간의 깊은 질문이 이야기 안에 숨어 있다. 우리는 늘 하나를 쥘 때 하나를 잃고 만다. 이런 양가적 인간을 집요하게 파헤치는 인간 탐구의 드라마가 바로 아이스킬로스의 비극이다. 놀라면 안 된다. 요새도 대학로 극장 무대에서는 아이스킬로스가 등장한다. 우리는 여전히 그를 심심치 않게 찾아 볼 수 있는 것이다. 바야흐로 여름이다. 시원하게 퍼붓는 비 속에서, 그때 그 사람들이 피와 눈물로 쓴 비극 한 장면을 맛보고 몸과 마음을 화끈하게 정화시켜 보자.

장재용

작가, 산악인, 꿈꾸는 월급쟁이

E-mail: dauac9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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