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November 17,Sunday

권문세족의 몰락

신하들의 권력을 극도로 제한하고 당파싸움의 근원을 제거한 태종은 국가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고 생각했겠지만, 조선건국 과정에서 4번의 공신 책봉이 새로운 특권층을 만들었다.

지난 이야기
고려말 30년 동안 여당인 권문세족과 야당인 신진사대부가 치열한 권력투쟁을 한 결과 신진사대부가 승리합니다. 그러나 토지개혁(과전법) 문제로 신진사대부도 곧 분열되어 온건파와 강경파로 갈라져서 대립하다 강경파가 승리하고 조선을 건국합니다. 조선건국 후 정국을 주도하던 정도전을 중심으로 하는 주류파들은 1차 왕자의 난으로 제거됩니다. 이렇게 조선 초 정치권 변동을 겪고 권력투쟁은 잠시 휴식기를 가집니다.

신진사대부 혁명파는 고려말 권문세족들과 신진사대부 온건파를 차례대로 제거하고 조선을 건국합니다. 조선건국 후 혁명파 주류세력의 수장 정도전은 조선의 토대를 마련하고 백성과 국가를 위한 개혁정책을 추진하던 중 기득권층의 많은 반발을 받고 제1차 왕자의 난이 발생하자 살해당합니다. 수장을 잃은 혁명파의 주류 세력들은 붕괴하고 비주류가 권력을 장악하게 됩니다. 권력투쟁의 속성상 반대파가 제거되면 내부분열이 발생하는데 태종과 세종 치세의 50년 동안은 당파싸움 없는 기간을 보냅니다. 그 이유는 태종 이방원의 강력한 왕권 강화로 분쟁의 소지를 미리 제거했고 또한 신하들의 권력이 강해지면 태종은 여지없이 철퇴를 내려 멸문지화를 당하니 신하들은 몸을 사릴 수밖에 없습니다. 태종의 왕권 강화정책 및 공신숙청, 외척의 숙청 사례를 살펴봅시다.
태종은 즉위 전 정종 치세의 세자시절에 사병제도를 혁파하여 국가의 화근을 제거합니다. 정도전의 사병 혁파 정책을 그토록 반대하며 반란을 일으켰던 태종 이방원, 정작 자신이 권력을 쥐게 되자 미래의 화근을 제거합니다. 또한 공신들을 숙청하는데 처남 4형제 민무구, 민무질, 민무휼, 민무회 모두 사형시킵니다. 민씨 4형제는 매형을 국왕으로 옹립하고 난 뒤, 좀 거들먹거리는 경향이 있었는데 외척을 경계한 태종의 심기를 거스른 죄로 죽습니다. 이때부터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는 원수 같은 부부가 됩니다. 그리고 태종 치세 말년에 양녕대군을 폐세자시키고 충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한 후 곧 세자에게 양위합니다. 상왕이 된 태종은 아들 세종의 장인이자 자신의 사돈인 심온을 거열형으로 사지를 찢어 죽입니다. 태종은 충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한 후 사돈인 이조판서 심온을 영의정으로 세 단계나 파격 승진을 시킨 후 명나라 사신으로 보냅니다. 심온이 명나라 사신으로 다녀오니, 사위는 임금이 되어있고 자신은 역적이 되어 있었습니다. 심온은 자신이 죽는 이유도 모른 체 처참하게 죽습니다.
외척을 경계한 태종의 견제에 의해 자신이 죽지만 박은의 참소로 죽는다고 생각한 심온은 죽기 전 유언을 남기는데 “향후 청송 심씨 가문은 반남 박씨 가문과 혼인 하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심온의 유언은 최근까지 잘 지켜져서 청송 심씨는 반남 박씨와 혼인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실 박씨 입장에서는 좀 억울하겠죠, 박씨는 자신도 심온의 죄가 없다는 것을 알지만 상왕 태종의 협박에 못 이겨 심온을 참소한 것입니다.

외척을 경계한 태종의 속마음도 모르고 태종에게 잘 보이려고 대간들이 세종대왕의 비 소헌왕후 심씨를 폐위하라고 상소를 올렸다가 전부 귀양을 갑니다. 아마도 태종은 속으로 기겁을 했으리라 짐작이 갑니다. 만약 며느리를 폐위시키면 새로 맞은 사돈을 다시 죽여서 외척을 경계해야 하니, 큰 일이었을 겁니다. 그렇게 처남과 사돈에게 역모죄를 씌워서 죽였으나 태종은 삼족을 멸하는 역모죄의 법률을 적용하지 않고 본인만 처벌하여 자손들은 보존시킵니다. 권력의 핵심만 제거하려는 태종의 의도입니다.

이토록 왕실의 안정을 추구한 태종의 결단은 아들 세종대왕의 치세를 꽃피게 만듭니다. 아마도 세종대왕은 아버지의 덕을 크게 본 것 같습니다. 신하들의 권력을 극도로 제한하고 당파싸움의 근원을 제거한 태종은 국가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고 생각했겠지만, 조선건국 과정에서 4번의 공신 책봉이 새로운 특권층을 만듭니다.

4번의 공신 책봉
① 회군공신 – 위화도 회군에 공을 세운 사람들을 포상하여 공신으로 책봉한 것인데요, 이는 좀 의문입니다. 당시는 고려시대고 고려 임금의 명령을 어기고 회군한 세력에게 국가를 위기에서 구한 공을 인정하여 포상했습니다.
② 건국공신 – 조선 건국에 공을 세운 사람들을 포상한 공신 책봉입니다.
③ 정사공신 – 사직을 바로 세웠다는 뜻인데 제1차 왕자의 난을 성공시킨 공을 포상한 공신 책봉입니다.
④ 좌명공신 – 좌명이란 임금이 될 사람을 도왔다는 뜻입니다.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을 때 태종 이방원을 도와 태종의 즉위에 도움을 준 사람들을 포상한 것입니다.
이렇게 4번의 공신 책봉으로 국가는 토지와 노비를 지급합니다. 1등 공신 책봉이 되면 토지 150 결 노비 100명을 받으니까 농지 약 50만 평과 농사지을 노비 100명을 지급한 대단한 포상입니다. 게다가 중복된 공신 책봉도 있어 수 백만 평의 토지를 받은 사람도 있습니다. 공신전은 면세가 되고 또한 상속됩니다. 이는 권력자에게는 필요악이 될지 모르겠지만 백성들 입장에서는 절대 악으로 존재합니다. 세종과 문종의 치세에는 공신 책봉이 없었으나 이후 사림파가 등장할 때까지 10번의 공신 책봉이 더 있습니다. 가히 조선은 공신들의 나라입니다. 조선 초 14번의 공신 책봉은 훈구파를 만듭니다. 훈공이 있는 사람이란 뜻의 ‘훈구파’는 이렇게 탄생합니다.
조선 초 공신 책봉이 많았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많은 분들이 궁금해할 것 같은데요. 조선이 건국되면서 태조 이성계는 보다 많은 협력자를 원했고 또한 불만을 가진 자의 회유 방법으로 공신 책봉을 했습니다. 그나마 일반 공신은 직접적으로 조선건국에 훈공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정치적 목적으로 직접 훈공이 없는 소수의 특정인을 공신으로 책봉하는데 반해 간접적인 지원 즉 마음속으로 지원한 사람에게 훈공을 내리는 ‘원종공신’은 기준이 참 애매합니다. 조선건국 원종공신은 1,000명 이상 책봉됐으니 새 왕조 창업에 대한 자신감이 결여된 것 인지 알 수 없네요.
또한 태종 이방원은 아버지에게 승낙을 받은 후계자가 아니고 반정으로 등극한 왕 이므로 왕조국가의 특성상 명분에 취약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두번이나 공신책봉을 합니다. 참고로 정상적인 왕위 계승이 되면 공신 책봉은 없습니다. 왕이 되지 못할 사람을 도와서 왕이 되게 했으므로 좌명 공신이 되는 것입니다. 훗날 세조, 성종, 중종도 즉위한 후 공신을 책봉하는데 이는 모두 정상적인 왕위계승이 아니어서 일어난 일입니다. 특히 세조는 등극 후 단종 복위에 대한 불안감을 느껴 조카 단종을 죽이고 죄책감을 느껴 3번의 공신 책봉을 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세조 치세부터 ‘훈구파’라는 용어가 생기는데 세조 치세의 공신들 횡포가 너무 심합니다. 세조시절 이야기는 순서가 되면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세조를 거쳐 성종 치세에는 많은 사림파 학자들이 관직으로 진출합니다. 조선의 3대 성군은 세종, 성종, 정조를 꼽는데 성리학자들이 가장 존경하는 성군은 바로 성종입니다. 성종은 성리학을 열심히 공부했고 유교 이념에 충실한 통치를 했으며 선비들의 면학을 최대한 지원한 군주입니다. 우리나라 특권층들은 병역과 세금의 의무에 소홀한 경우가 많은데 조선 성종 때 비롯됩니다. 과거 준비에 바쁜 선비를 위해서 병역을 면제하고 과거 준비하느라 생업에 종사할 수 없는 선비를 위해서 한시적 면세조치를 합니다. 가히 선비들을 위한 성군이라 하겠습니다. 이러한 여건 속에서 사림파가 정계에 진출합니다. 조선건국 100년 후 드디어 사림파가 훈구파에 도전합니다. 다시 한번 피 튀기는 당파싸움이 시작됩니다.
‘성종 대왕’, 조선의 선비들이 성군이라 칭송한 군주입니다. 성종은 훈구파의 전횡을 견제하기 위해 새 인물을 찾던 중 사림의 대표 격인 김종직을 중용합니다. 김종직의 부친이자 스승인 김숙자는 야은 길재의 제자입니다. 따라서 김종직은 고려말 신진사대부 온건파의 학문적 후예들입니다. 김종직은 뛰어난 제자들을 많이 양성하여 김종직을 따르는 선비들로 인해, 하나의 세력으로 등장합니다. 김종직의 제자로는 김일손, 정여창, 김굉필 등이 있습니다. 훈구파 전횡을 견제하려는 성종과 정계복귀를 노리는 사림파는 서로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집니다. 이렇게 100년 동안 와신상담하다가 사림파는 세상으로 나옵니다.

이념과 명분과 도덕으로 무장한 사림파들은 훈구파의 부패를 비판했으나 되레 훈구파의 공격을 받습니다. 100년 동안 숨어 살다 세상에 나온 사림파는 100년간 훈구파와 권력투쟁을 벌였는데 수천 명의 사림파가 희생당합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4대 사화’ 입니다. 4대 사화로 수천 명이 죽고 귀양 가고 엄청난 치명타를 입은 사림파, 당연히 사라질 파로 생각했지만, 훗날 끈질기게 살아남아 훈구파를 사라지게 만듭니다.
또한 고려 말 유입된 성리학은 200년간 공부한 사림파에 의해서 학문적 체계를 90% 완성합니다. 마지막은 관혼상제에 관련된 ‘예론’인데 현종 때 벌어진 [예송논쟁]입니다. 유교 및 성리학은 중국에서 시작했으나 이론적 정비가 가장 잘된 나라는 바로 대한민국입니다. 유교를 공부하러 중국학자들이 한국을 찾습니다.

다음 이야기
조선 초 비정상적으로 즉위한 경우 왕권에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어서 무더기 공신 책봉을 시행합니다. 이렇게 [새로운 특권층을 만드는 조선] 다음 시간에 살펴봅시다.

전 종 길
영남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前 (주)대은영상 대표,
現 아마추어 사학가 활동,(주)하나로 축산 대표
Kakao talk ID : jeonjongkil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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