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September 20,Sunday

동아시아 3국 전통 정치제도를 비교하다

지난 이야기
성종은 사림파를 등용하여 훈구파 대신들의 전횡을 견제하는데 신하가 신하를 견제하는 “이신제신”입니다. 성종은 이신제신을 위해 언론의 자유를 입법화 하는데 500년 전 중세사회에서는 획기적인 사건입니다. 새로운 제도에 의해 사림파들은 100년 동안의 은둔생활을 접고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훈구파와 100년 동안 치열한 정치투쟁을 합니다.

중세시대 선진화된 제도를 보유했던 조선
현대의 시각으로 보면 올바른 역사를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현대의 시각을 버리고 과거의 시각으로 보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우리가 조선의 붕당정치나 당쟁을 늘 나쁘게 본 것은 현재의 시각이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조선시대 그 당시에도 “민심이 천심” 이라는 도덕적 기준이 있었지만 현대처럼 일반인의 저항이나 견제가 힘든 시절이라 정치인 스스로 바른 정치를 해야 하는데 모든 정치인이 성인이 아니라서 쉽지 않습니다. 가끔 자신을 희생하며 백성을 위한 정치를 주장하는 성인들이 있었으나 한계에 부딪혀 대부분 실패합니다.
이러한 중세시대에 전제왕권 혹은 독재 권력을 비판하는 언론기관이 (삼사) 존재한 조선의 정치제도는 분명 선진화된 정치제도 입니다. 이러한 제도의 영향으로 권력자는 항상 반대파 대간들을 의식하여 자신들의 욕심을 자제합니다. 조선건국 후 100년 동안 삼사의 대간들은 국왕이나 권력자의 눈치를 많이 보고 자신들의 직분을 소홀히 했는데 성종때 사림파의 등장으로 정치가 달라집니다. 사림파들은 성리학 이론에 충실한 선비라서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올바른 간언을 하는 사람이 참된 선비라는 가치관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성격의 사림파가 야당의 역할을 했으므로 여당인 훈구파의 부패를 어느정도 제어할 수 있었습니다.

잔혹한 정적 제거를 제도화한 명나라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위해 14세기 ~ 16세기 이웃나라 중국과 일본의 사례를 살펴 보겠습니다. 권문세족들의 횡포가 극심했던 고려말 당시 중국은 원나라 조정의 무능과 행정체계가 무너져 고려말 권문세족의 횡포를 능가하는 지방세력의 횡포가 많았습니다. 백성들의 고통은 반란으로 이어져 1368년 주원장은 명나라를 건국하게 됩니다.
명나라를 건국한 주원장은 영토 확장과 농지개간을 하여 이전보다 두배 가까이 늘어난 5700만 헥타의 농지를 가집니다. 주변국 정복으로 인구가 늘어나고 농사지을 땅이 늘어나니 인구 유입이 발생하여 중국 인구는 6천만명을 초과합니다. 당시의 조선은 오백만 정도로 예상됩니다.
주원장은 41세에 명나라를 건국하고 65세에 아끼던 태자 주표가 죽자 어린 손자 주윤문을 황태손에 봉하고 후계를 결정합니다. 그러나 주원장의 넷째 아들 주체는 야망을 지닌 인물로 조선의 태종 이방원과 아주 비슷한 인물입니다. 명나라에 폭풍이 예고됩니다.

태조 주원장 홍무제는 태자 주표를 위해 많은 공신들을 제거합니다. 그런데 큰아들 주표가 갑자기 죽고 넷째 아들 주체를 태자로 책봉하려 했으나 장자세습의 원칙에 어긋난다는 신하들의 만류에 뜻을 접고 장손 주윤문을 황태손에 책봉합니다. 다음 후계를 손자로 정한 주원장은 넷째 아들을 후계로 정하지 못한 애통함으로 그날밤 통곡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현실을 인정한 주원장은 아들을 위해서는 현재까지 제거한 공신만으로 충분하지만 어리고 여린 성품의 손자가 공신들에게 휘둘리지 않게 하려면 의심가는 공신들을 추가로 많이 제거할 필요성을 느낍니다. 당시 주원장은 6년간 1만 2천명을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역모죄는 9족, 10족을 죽이는 중국의 법률 때문에 그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때문입니다. 9족은 혈족 전체를 뜻하고 10족은 친구와 동문들을 뜻하는데 역모죄로 몰리면 주변 사람들은 전부 죽습니다. 대신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눈치만 봅니다. 주원장은 6년간 주변사람들을 끝없이 의심하여 죽이고 71세의 나이로 자신도 죽습니다.

1398년 주원장이 죽고 주체는 1402년 조카 혜제를 몰아내고 명나라 제3대 황제로 등극하니 태종 영락제 입니다. 이를 “정난의 변”이라고 하는데 조선의 태종 이방원의 제1차 왕자의 난인 “정난”과 이름이 같습니다. “정난지변” 와중에 죽은 사람과 영락제 즉위 후 반대파 숙청때 죽은 사람이 2만명이 넘는다고 하니 아마도 궁궐이 도살장이 된 듯 합니다.
그러나 태종 영락제는 재능이 뛰어난 황제라 문무 양면에 걸쳐 재능을 발휘합니다. 수차례 원정으로 몽고의 위협을 제거하고 정화를 시켜 바닷길을 개척합니다. 중국 명나라는 태조 홍무제, 제3대 영락제, 제5대 선덕제, 50년간 국력이 팽창하고 백성들은 배고픔을 면하고 살았습니다. 그 후 환관의 발호로 국정이 어지러워서 명나라가 망할때 까지 200년 동안 중국 백성들은 고달픈 삶을 삽니다. 동시대의 조선보다 훨씬 힘들게 삽니다. 또한 신하들의 언론자유는 조선처럼 보장되지 못했습니다. 언관들이 존재했으나 황제나 권력자들을 무서워하여 조선처럼 견제기능을 발휘할 수 없었습니다.

세금 생산량 70~80%, 그리고 참근교대
이제 일본의 경우를 살펴봅시다. 아시카가 가문이 통치하는 무로마치 막부는 강력한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가 1408년 죽고, 후계 문제로 유력한 영주간 싸움이 벌어지는데 이를 “오닌의난”이라 합니다. 요시미쓰가 죽고 “오닌의난” 부터 130년간 일본은 “전국시대”가 됩니다. 일본의 전국시대는 중국의 춘추 전국시대와 비슷합니다. 일본의 전국시대에 전쟁물자 동원으로 농민들은 생산량의 70~80% 세금으로 납부합니다. 게다가 젊은 남자들은 전부 전쟁에 동원되고 노인과 부녀자들이 농사를 짓고 농업기술 부족까지 겹쳐 농업 생산성이 떨어집니다. 하루종일 일해도 배고픔을 면할길이 없는 일본의 농민들 입니다.
그러면 전국시대가 끝나고 토쿠가와 막부가 들어서면서 세금은 줄었을까요? 아닙니다. 70~80% 세금은 그대로 유지됩니다. 근본 이유는 두가지인데 첫째는 다단계식 영주 분봉제도 입니다. 보통 영주들은 큰아들에게 영주 자리를 물려주고 작은 아들에게 소영주 분봉을 합니다. 이러한 사례가 한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수차례 거듭되는 경우가 있어 자연히 세금부담이 늘어납니다.

둘째는 도쿠가와 막부의 3대 쇼군 이에미쓰가 만든 “참근교대” 제도 입니다. 지방영주가 부를 축적하면 막부에 위협이 되므로 반란을 억제하기 위해 영주의 처자식들은 애도에 인질로 두고 영주는 해마다 애도에서 일정기간 근무를 하는 제도입니다. 멀리 떨어진 영주들은 두달 걸려서 애도에 갔다가 애도에 두달 정도 머물고 다시 두달 걸려서 자신의 영지로 돌아옵니다. 보통 500명 정도의 가신, 무사 등을 거느리고 가는 6개월 여정이라 1년 세수의 60% 정도를 참근교대 경비로 사용한다고 하니 일본의 농민들은 죽을 맛입니다.
“참근교대”는 일본 근대화에 긍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는데요. 현재 가치로 1인당 하루 만엔 정도의 경비를 사용하면 6개월 여정 경비는 한화로 100억에 달합니다. 여기에 쇼군에게 바치는 공물이 추가됩니다. 영주마다 재력의 차이가 존재 하겠지만 지방 영주가 부담 하기에는 힘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주들의 지출은 상인들의 수입이 되므로 근대 일본의 산업자본이 되어 일본의 근대화에 기여 하기도 합니다. 또한 참근교대는 애도에 영주들의 가족과 상인들이 모여들어 인구 100만 넘는 대도시로 발전하고 애도와 지방의 문화교류에 기여하게 됩니다. 오늘날의 도쿄 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으로 탄생합니다.

영주들에게 많은 비용을 유발시켜 반란을 막으려고 생긴 “참근교대”는 신의 한수가 되어 일본은 아시아 최초의 근대국가로 발전하게 됩니다. 이렇듯 일본의 막부는 백성들의 생활은 안중에도 없고 오로지 막부의 권력 유지만 생각합니다. 하지만 소수의 상류층과 상인들에게 돌아간 혜택은 농민에게 부담으로 전가되어 농민들은 힘든 삶을 영위합니다.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일본 국민의 적게 먹는 소식문화는 과중한 세금 때문 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임진왜란때 조선의 장수들은 왜군 군량미 계산을 조선군과 같이 하여 왜군의 군량미가 떨어졌다고 보고 공격했는데 사실은 군량미가 많이 남아 있어서 공격에 실패 했다는 사례는 유명한 일화입니다. 알고보니 일본군은 조선군 식량 소비의 40% 정도 였습니다.
일본은 무사정치를 해서 조선처럼 당파, 붕당 이런 것은 없습니다. 언론도 없고 반대할 자유도 없어서 오직 복종만 존재 합니다. 일본의 무사 정치와 다르게 우리는 문관 정치를 했고 언론의 자유와 반대할 자유를 부여했기 때문에 당파싸움이 발생합니다.

다음 이야기
한국 중국 일본 삼국의 정치제도 차이로 인한 국민성의 차별화에 대해 살펴보고 “4대사화” 이야기 시작 하겠습니다


전 종 길
영남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前 (주)대은영상 대표,
現 아마추어 사학가 활동,(주)하나로 축산 대표
Kakao talk ID : jeonjongkil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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