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April 26,Friday

통(通)하였느냐?

한 레스토랑에서 모임이 있어 자리를 잡았다. 담소를 나누다 문득 눈에 들어오는 광경이 있었다.
우리 건너편 자리였다. 그들은 한 가족이었다. 부부와 대여섯살 정도 되어 보이는 딸이 있었다. 자리가 뷔페이다보니 음식을 챙기느라 어린 딸의 움직임이 부산했다. 화목해 보였다.
손님들과 식사를 하고 대화가 어느 정도 정리될 무렵 그들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그 가족도 양이 찼는지 엄마 아빠는 자리에 남겨둔 채 어린 딸만 과자와 아이스크림 코너를 왕래하며 즐기고 있었다. 아빠가 엄마에게 뭔가를 얘기하고 엄마는 웃으며 남편의 말을 받아주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의 모습이 어딘지 어색했다. 그들은 서로를 마주 대하고 얘기하고 있었지만 마주 보고 있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이유를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스마트폰을 쥐고 있었다. 스마트폰이 없으면 아무 것도 못하는 때가 되었다는데 이 가족도 그랬던가 보다. 그래도 어린 딸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는지 손에 폰이 없었다. 아마도 부모는 모두 일을 하는가 보다. 그러니 외부의 소식에 신경을 써야 하고 때로는 답을 해줘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것이다. 사회가 변화하니 가정의 모습도 변해갈 수밖에 없다.

이런 생각을 하며 잠시 보았는데 그래도 뭔가 이상했다. 아빠는 폰을 가끔씩 들어보고 확인하는 수준이었는데 엄마는 내내 폰을 손에 쥐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도 아빠가 고개를 들어 뭔가를 얘기하면 엄마는 금방 답을 하곤 했다. 신기한 광경이었다. 그때 스마트폰 화면이 보였다. 여자가 내게서 등을 보이고 사선 방향으로 앉은 탓이기도 했다. 나는 단번에 그녀의 스마트폰 내용을 훔쳐볼 수 있었다. 그녀의 눈을 뗄 수 없게 하는 중요하고 은밀한 내용, 그녀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남편의 물음에 간신히 대답할 수밖에 없게 하는 그 불안한 내용. 음식을 가지러 다니기에 부산한 아이를 챙길 수 없게 만든 그 내용. 그녀는 게임, 테트리스를 하고 있었다.
사실 나는 그 게임 이름이 뭔지 잘 모른다. 다만 내가 청소년기에 전자오락실에서 그런 부류의 게임을 테트리스라고 불렀다.
이제 내가 잘 아는 회사의 임원 이야기이다. 그는 스스로를 소통의 달인이라고 했다. 그는 SNS(Social Network Service)를 기가 막히게 잘 사용했다. SNS를 통해 자기 일정을 공유했고 그 가운데 일어나는 일들을 알렸다. 그는 어디서나 사진을 찍었고 감상을 전했다. 페이스북과 카톡, 밴드 등 여러 모양으로 연결된 이들은 이런 방식으로 그와 열린 소통을 하고 있었다. 그는 회사의 직원은 물론 클라이언트, 각종 단체와 그렇게 소통하고 생각을 전한다고 했다. 그런 그가 우리 회사를 방문했다. 그의 소통의 기술을 엿볼 기회가 생겼으니 반가운 일이었다.
회사의 주요한 인원들이 함께 모인 자리이니 나는 내심 그의 여러 이야기를 기대했다. 한국 기업들의 상황, 많은 변화의 어려움 속에서 직원들과의 유대는 어떻게 유지하는지, 베트남에서 일하는 우리가 그의 소통 방식에 대해 배울 점들이 있는지. 그래서 자유로운 얘기가 가능한 맥주전문점으로 자리를 잡고 분위기를 유도했다. 그는 앉자마자 우리에게 사진을 함께 찍자고 했다. 확실히 ‘달인’다웠다. 그런데 그게 다였다. 그가 ‘소통’을 하느라 바빴기 때문이었다.

그는 우리 앞에 앉아 카톡을 했다. 우리 질문에 대답은 가끔씩. 페이스북도 열었다. 함께 찍은 사진을 올리고 감상을 적었다. 그는 어느 잡지에 월간 칼럼을 그림과 함께 올린다고 하며 그 자리에서 우리와 함께 한 자리의 글을 적기 시작했다. 우리가 없이 우리의 이야기를 써내려 갔다. 그가 돌아간 후 나는 그와 연결된 SNS 계정을 삭제해 버렸다.

그와 테트리스 여인이 무엇이 다를까? 없다. 그는 우리를 앞두고 게임을 한 바나 다름없었다. 마치 우리 얘기를 다 듣고 있다는 듯 미소를 머금고 말이다. 그의 소통의 행위는 ‘전달’하는 것인지는 몰라도 ‘나누는’ 것은 아니었다. 그와 두어 시간을 함께 했지만 우리와 진지하게 나눈 시간은 단 1분도 없었으니 말이다.

user image

소통을 기술이라고 말한다. 표준국어대사전에 의하면 소통은 ‘막히지 아니하고 잘 통함’ 또는 ‘뜻이 서로 통하여 오해가 없음’ 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몇 가지 사건으로 나는 소통의 정의를 이렇게 내린다. 소통이란 경청의 목적이며 이해의 이음동의어이고 상대에의 관심을 배경으로 하는 행위이다.
소통은 대상이 있다. 그 대상은 익명의 어느 누군가가 아닌 특정한 대상이나 그룹이 된다. 그러므로 소통의 방식은 사방으로 뿌리는 찌라시같이 되어서는 안된다. 소통의 대상은 다수일지라도 상대자이다. 나와 마주하고 있는 바로 저 사람이고 그들이 된다. 이것이 소통을 이해하는 기본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러므로 주소록에 등록된 모든 이들에게 날리는 새해인사와 덕담처럼 소통해서는 안된다. 거기에도 감사함은 있겠지만 허망함도 있다. 소통의 시작은 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말을 먼저 듣는데 있다. 그 가운데 교감, 공감, 그리고 조율의 진정성이 나타나는 것일게다.
가족을 앞에 두고 테트리스를 하는 사람에게 어떤 진정성이 있을까. 그녀에게 남편의 이야기가, 아이의 건네는 말이 제대로 전달되었을리 없다. 그녀가 원한 것은 그 판의 클리어였을 테니까. 그래서 종종 남편에게 미소로 화답한 그녀의 응답은 대화도 소통도 아닌 다른 어떤 것이다. 소통의 달인을 자처한 그 분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자기 앞의 상대를 두고 그 자리의 일을 비행기로 다섯 시간이나 떨어진 한국의 누군가와 소통을 시도하고 있었으므로 경청하고자 하는 마음가짐이 없었고 당연히 진심이 결여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앞의 상대자에게 최선을 다하지 않는데 어떻게 더 멀리 떨어진 이들에게 최선을 다 할 수 있을까. 그런 것은 소통이 아니라 개인 홍보 또는 사람관리책이라고 불러야 한다.

베트남이야 말로 소통이 필요한 곳이다. 우리가 외국인이어서 그렇다. 그들이 외국인이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끼리는 행간의 표현을 감춰도 이해할 수 있지만 언어가 다른 그들과는 아니다. 그럼 나는 어찌할까? 스스로 물음을 던져 넣고 보니 이런 부분을 어찌 해결해야 하는 가로 고민이 많아진다.

오늘 아침엔 우리 직원들의 자리 하나하나 돌아다니며 눈인사를 나눠야겠다. 웃으며 어깨도 한번 쳐주어야겠다. 소통이 기술이라면 그 재료를 찾는 것도 기술이겠다. 재료를 찾았다면? 거기에 그들에 대한 나의 진실한 관심을 버무려 보자. 그러면 통(通)하리라. /夢先生

건축가, 작가, 일러스트레이터 / 정림건축 베트남 법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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