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February 20,Thursday

중종반정과 박원종 그리고 공신

지난 이야기
연산군은 어머니 복수를 위해 갑자사화를 일으킨 정황은 어느정도 사실이지만 군주의 권력을 반석위에 올려 놓기위해 사건을 확대 했습니다. 갑자사화 후 강화된 군주의 권력은 자신의 사치와 쾌락을 위해 사용했으며 이로 인해 백성들은 조선건국 후 가장 고통받는 시절을 보냅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조선 최초로 임금이 쫓겨나는 사건이 벌어지는데 이른바 “중종반정”입니다.


반정의 배경과 기회주의자들
중종반정이 일어난 배경에 대해 조선왕조 중종실록 박원종 졸기 내용을 살펴보면, “연산군의 백모이면서 박원종의 누나인 월산대군 부인이 연산군의 아기를 임신하자 부끄러워 자결을 했고 이에 격분한 박원종은 죽은 누이의 복수를 위해 반정을 일으켰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상당히 믿기 힘든 기록 입니다. 중종반정 당시 월산대군 부인의 나이는 50대 초반 입니다. 500년 여성의 건강 상태로 임신하기 불가능한 연령이고, 세자시절 자신이 가장 믿고 의지했던 백모를, 게다가 당시 노인의 나이가 된 백모를 강간했다는 기록은 믿기 어렵습니다. 반정군 입장에서 연산군에게 폭군의 이미지를 씌우고 반정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조작된 기록으로 보입니다.
1506년 12년 동안의 연산군 치세는 끝나고 만 18세 진성대군이 즉위하니 조선 11대 임금 중종 입니다. 반정 3대장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은 반정 후 연산군의 폭정을 일소하고 성종대왕 시절의 풍속으로 되돌아가겠다 라는 반정 공약을 합니다. 성균관과 삼사의 부활, 무오사화 갑자사화 당시 희생된 사람들을 복권하고, 반정 6일 후 반정공신을 책봉 합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사안 연산군과 협조하여 개인 이익을 추구한 사람들 처벌은 없고 오히려 그들은 반정공신 명단에 이름을 올립니다. 옛날 몽고에 협조하여 고려 백성을 착취한 “부원배”가 권문세족 지위를 유지하듯, 또한 일제 식민지에 협조한 친일 매국노가 행방 후 관직에 등용되는 것과 같은 경우가 중종반정 때에도 있었습니다.
역사 기록을 살펴보면 기회주의자들을 변신을 잘 합니다. 변혁의 시기에는 협조자가 필요하므로 새로운 권력자에게 빌 붙어 자신의 위치를 유지시키죠. 힘 없고 어린 중종은 박원종의 요청을 전부 승낙 합니다. 이렇듯 반역자 처벌이 빠진 개혁은 나중에 분쟁의 여지를 남겨 조광조가 희생된 “기묘사화” 발생의 원인이 됩니다. 또한 연산군이 데리고 놀던 천명의 미녀 청평 흥청 처리가 기 막힙니다. 천명의 미녀를 변방지역 관기로 보내기로 했으나 대부분은 반정공신 첩으로 가고 일부만 변경으로 보냅니다. 물론 이는 중종의 어명으로 진행되지만 힘 없는 임금 중종의 자발적인 의사라고 보기 힘듭니다.

공신과 위훈삭제 사건
반정을 계획하던 초기 박원종 일파는 반정의 확실한 성공을 위하여 간신 임사홍, 연산군의 장인 신수근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을 반정에 참여 시킵니다. 또한 반정에 참여하기를 망설이다 사태가 기울어 진 것을 느끼고 거사 당일 반정군에 참여한 사람까지 전부 공신에 책봉하니 공신책봉 숫자가 117명 입니다. 이들 중 실제로 반정에 참가하지 않고 반정 주역들의 친척들 까지 대부분 공신책봉을 받아서 이렇게 숫자가 늘어난 것입니다. 후에 76명의 공신들이 공신 박탈을 당하는데 이른바 “위훈삭제” 사건입니다. 또한 “위훈삭제” 사건은 기묘사화 발단 원인이 됩니다. 공신에 책봉된 사람들 중 대표적인 몇 사람을 살펴봅시다.
연산군 시절 영의정 유순, 우의정 김수동 등은 2등 공신에 책봉 되었는데 이들은 반정에 참가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김수동은 반정 주역들에게 청탁하여 자신의 숙부와 아우까지 공신에 끼워 넣었습니다. 구수영은 연산군 임사홍 신수근 등과 두루 사돈관계를 맺고 남의 집 여종을 연산군에게 바쳐 총애를 받았습니다. 애초에 구수영은 반정군의 제거 대상인데 반정의 낌새를 채고 거사일에 반정군에 참여하고 공신에 책봉 됩니다. 또한 구수영은 반정 당일 연산군의 딸인 며느리를 쫓아내는 짓을 합니다. 중종반정 후 공신책봉 명단의 80%는 의문이 가는 사람들 입니다. 이렇게 조선의 10번째 공신인 정국공신 117명이 탄생하는데 이들 중 훈구파 계열 1/3, 그외 2/3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즉 공신들에 대한 비판적 당론을 가졌던 사림파가 훈구파 보다 많이 공신에 책봉 됩니다. 엉터리 공신책봉에 대한 반발이 극심했던 사림파들도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일에는 체면도 없나 봅니다.
또한 공신책봉 다음날 반정주역들은 중종비 신씨를 폐위하고 새로 왕비를 간택 하라고 요구 합니다. 중종비 신씨는 반정군에 의해 참수당한 신수근의 딸 입니다. 반정주역들은 자신들 미래의 안전을 보장 받으려고 역적의 딸은 중전이 될 수 없다고 주장 합니다. 힘 없는 중종은 사랑하는 아내를 내치고 아내가 사는 인왕산 방향을 매일 바라보는데 이 소식을 들은 단경왕후 신씨는 자신이 입던 치마를 인왕산 바위에 널어 놓고 중종이 볼 수 있게끔 했고 이때부터 치마바위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야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단경왕후 신씨는 이후 중종의 부름을 받지 못하고 폐서인의 신분으로 살다가 죽었는데 200년 넘게 지난 후 영조때 왕비로 복원 됩니다.

“차별 받으니까 저항했고 나도 차별하는 사람이 되고싶다”
대권 계승권이 없는 사람에게 비정상적인 대권이 승계될 때 많은 후원자가 필요합니다. 후원자를 얻기 위해 공신책봉을 푸짐하게 합니다. 어차피 자기 재산도 아니고 국가 재산으로 지급 하니까 화끈하게 인심 씁니다. 그러나 중중 반정후 정국공신 책봉 때에는 유독 공신의 숫자가 많은데다 가짜 공신이 많아서 더 문제 입니다. 조선시대에 공신책봉이 되면 세금과 군역 면제, 과거시험 없이 관직에 임명되는 음서의 혜택, 세습 가능한 토지 공신전 하사, 그 외 노비 하사 등 많은 특권을 누리는데 조선왕조 500년 동안 26번 공신책봉을 했고 이는 수천명 특권층을 양산 합니다. 공신책봉의 심각한 문제는 특권 자체보다 특권이 당대에 그치지 않고 세습 된다는 사실 입니다. 이렇게 세습되는 특권은 백성들의 부담이 되어 백성들은 가난을 세습하게 됩니다.
중종반정 후 권력은 반정 주역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 등) 공신들에게 돌아가고 또한 삼사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대간들은 연산군 이전 시절인 성종 때의 권력을 형성 합니다. 이들 틈새에서 만 18세의 청년 중종은 지원받는 정치세력이 있을 수 없고 게다가 성격이 내성적이고 결단력이 없어 무슨 일이든지 박원종 등의 눈치를 살핍니다. 임금이 되기 전에는 살기 위해서 이복형 연산군의 눈치를 보다가 임금이 되고나서는 쫓겨나는 임금이 되지 않으려고 공신들의 눈치를 보며 지냅니다. 조선시대 권력의 삼각 구도인 왕권, 대신권력, 대간권력 중 미약한 왕권을 사이에 두고 공신과 대간의 충돌이 시작 됩니다.
대간들은 공이 없이 공신에 책봉된 자들을 공신록에서 삭제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박원종은 모두 한결같은 마음으로 반정을 했으니까 한번 결정된 것은 바꿀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대간들도 물러서지 않고 하루가 다르게 탄핵의 강도가 높아집니다. 앞서 거론한 연산군 시절의 영의정 유순은 파직하고 우의정 김수동은 귀양 보내고 간신 구수영은 사형 시키라고 주장합니다. 또한 가짜 공신들의 처벌을 요구합니다. 대간들의 탄핵에 고민하던 박원종은 유자광을 희생시키고 나머지 공신들 즉 자신의 세력 기반을 보전하고자 합니다. 대간들도 박원종의 힘을 이길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유자광을 처벌하는 선에서 일단락 됩니다. 유자광 그는 무오사화의 주역으로 활동하여 사림파의 공적이 되었고, 또 서자 출신 유자광이 양반들과 같은 대우를 받고 게다가 출세까지 하니 사림파의 양반들의 자존심이 무척 상했습니다. 유자광은 5년 후 유배지에서 죽습니다. 기회주의자 간신 등 나쁜 수식어가 붙는 유자광은 죽으면서 한 말은 “차별 받으니까 저항했고 나도 차별하는 사람이 되고싶다”입니다
박원종은 자신처럼 또 반정을 일으키는 사람이 있을까 늘 걱정 입니다. 게다가 불합리한 공신책봉과 안정되지 못한 정권 등 불안요소는 곳곳에서 감지됩니다. 박원종이 거사를 앞당긴 이유는 전라도에서 반정의 기운을 감지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아닌 다른 세력이 반정에 성공할 경우 연산군 시절의 벼슬아치들은 처벌받을 가능성도 많고 용케 처벌은 면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힘 없는 양반으로 살게 됩니다. 전라도에 사는 유빈은 대사간 이과와 함께 반정을 계획 했지만 한양에서 먼 지방이라 한양 사람 박원종의 순발력에 뒤진 것입니다. 그러나 반정 후 박원종 일파의 권력 독점을 빌미로 대사간 이과는 제 2의 반정을 계획하다가 서얼 노영손의 고변으로 발각됩니다. 역모 관련자들은 전부 체포되고 신속한 국문 끝에 이과 유빈 김준손 등 주모자 3명을 참수하고 단순 가담자 100여명은 귀양을 갑니다. 연좌도 없는 가벼운 처벌입니다.
그런데 이해하기 힘든 일이 일어납니다. 이과의 난을 고변한 노영손의 공신책봉은 수긍할 수 있으나 이과의 난을 추국하던 위관들을 전부 공신에 책봉합니다. 22명의 정난공신이 책봉 되는데 노영손을 제외하고 대부분이 반정공신들이 다시 공신책봉을 받은 중복 공신 입니다. 공신책봉 대상자들 조차 민망해서 공신책봉을 거부했던 이상한 공신책봉은 중종의 주장에 의한 것입니다. 즉위 1년만에 벌어진 역모사건을 겪은 중종은 자신의 옥좌를 지켜줄 사람들은 결국 공신들 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하여 조선의 제11번째 공신책봉인 “정난공신”이 탄생합니다. 가히 공신의 국가라고 부를만한 조선 입니다. 이렇게 막강한 공신들도 퇴조하고 사림파의 새로운 인물 조광조가 등장합니다. “조광조의 개혁정책” 다음 시간에 살펴 봅시다.

다음 이야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반정 3대장이 잇달아 사망하고 불안해 하는 임금 중종의 마음을 채우는 조광조가 등장합니다. 젊은 사림파 학자 조광조는 조선의 개혁을 꿈꾸며 자신의 이상을 실현시켜 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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