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April 26,Friday

삼국통일 이야기 – 1편

지난 이야기
2천년 동안 지속된 순장제도는 수 백만명을 희생 시켰습니다. 변화를 거부하고 국가 멸망때까지 순장제도를 지킨 가야는 인구 부족으로 생산성 감소, 국방력 약화로 신라에게 멸망 당합니다. 또한 인도적 차원에서 유교 학자들의 순장제도 반대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기득권층의 욕심으로 순장제도의 반대가 많은 가운데 천년 동안 순장제도는 더 지속됩니다. 예나 지금이나 기득권층의 욕심으로 국민들만 힘듭니다.

우리민족 최초의 통일인 삼국 통일은 우리에게 많은 의미를 부여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라가 통일한 삼국 통일의 긍정적인 측면보다 부정적인 측면을 더 많이 이야기 합니다. 그 이유는 통일 후 우리 민족의 영토가 대동강 이남으로 축소 되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고구려가 통일 했다면 만주 땅은 우리 국토가 되었을 것이고, 남북 분단이 되었다 해도 압록강 이남은 남한의 영토 만주는 북한 영토가 되었을 것 이라고 말합니다. 애국적인 마음을 담은 견해들을 많이 제시 하는데요, 이글의 말미에 독자들이 궁금해 하시고 아쉬워 하시는 의문점에 대해 역사 학자들과 필자의 견해를 소개하고, 독자들이 놓친 통일의 의미도 설명 드리겠습니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삼국통일 당시의 한반도와 주변 국가들의 상황 및 국제 관계를 살펴 보겠습니다. 삼국 중 가장 후진국인 신라는 6세기 중반 (서기 550년 경) 진흥왕 이라는 걸출한 군주에 의해 급속한 발전을 합니다. 신라는 강해진 국력을 바탕으로 한반도 내에서는 고구려와 대등한 위치에 서게 됩니다. 고구려의 상대는 중국 이므로 고구려 군사력의 80%는 요동에 주둔하여 중국을 경계 했습니다. 따라서 한강 이남의 백제와 신라에 대해서는 고구려 국력의 전부를 쏟아 붓기 힘든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또한 백제는 성왕때 신라 진흥왕과 동맹을 맺고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하여 한강 유역을 탈환합니다. 하지만 신라 진흥왕의 배신으로 백제는 한강 유역을 잃었습니다. 분노한 백제 성왕은 신라를 공격하다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합니다. 그이후 백제는 절치부심하며 신라에게 복수의 칼을 갑니다.

이번에는 중국의 상황을 살펴봅시다.
5호 16국의 혼란기를 거쳐 중원의 북위와 강남의 남진 4개국 등 다섯 나라로 분열된 국가가 있었는데 수 문제가 중국 역사상 세번째로 통일된 제국을 건설 합니다. 안정된 통일 국가인 중국은 고구려의 우환거리 입니다. 5세기 초 광개토 대왕의 정복 전쟁도 중국이 5호 16국으로 분열된 혼란기이므로 가능했던 측면도 있었습니다. 7세기 당시 중국은 고구려가 사라져야 중국 동북지역의 평화가 유지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중국 중심의 세계 질서를 거부하는 고구려, 자주성이 강한 고구려, 하지만 군사력은 강한 고구려, 중국 입장에서는 이러한 고구려를 그냥 두고 볼 수 없는 국가입니다. 중국이 반드시 정복해야 할 대상이 고구려 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와 당나라는 국가의 운명을 걸고 고구려와 전면전을 벌입니다. 서기 589년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는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를 거부하는 고구려에 대한 대규모 침공을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수나라를 건국한 문제는 건국 후 9년이 지난 598년 30만 대군을 동원하여 수륙 양면으로 고구려를 침공합니다. 이때부터 고구려는 60년간 중국과 전쟁을 치르고 국력이 소진됩니다. 당시 동북 아시아 정세는 중국, 북방민족, 고구려, 백제, 신라, 왜 등 많은 국가들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습니다. 이러한 지정학적 요인으로 삼국이 통일되던 7세기에는 국방력과 경제력에 더하여 외교력도 국력을 평가하는 한 요소로 작용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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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기 한반도 주변의 국제 정세를 좀 더 자세히 살펴봅시다.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할 때 고구려는 평원왕이 (평강공주의 아버지 온달 장군의 장인) 죽고 평원왕의 장남인 영양왕이 등극 했습니다. 중국의 통일에 부담을 느낀 고구려는 형식상 외교 사절을 수나라에 보내지만 전쟁을 예감합니다. 첩자들의 보고로 수 문제 양견의 전쟁 의지를 느낀 고구려 영양왕은 598년 친히 1만명의 군대를 이끌고 요하를 건너 수나라의 보급 창고가 있는 영주를 (지금의 조양) 선제 공격 합니다. 고구려 침공의 빌미를 찾던 수 문제는 고구려가 영주를 공격하자 곧이어 30만명의 군대를 동원해서 고구려를 침략합니다. 수나라는 육군과 해군의 양동 작전을 전개 하였으나 육군은 진군 도중에 전염병이 번져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떨어진 사기로 요하를 건넌 수나라 군대는 고구려 강이식 장군의 공격을 받고 전투다운 전투도 못해보고 패주 합니다. 이것은 전쟁도 아니고 일방적이 공격과 학살입니다. 한편 수나라 해군을 이끈 해군 총관 주라후는 서해를 건너다 풍랑을 만나 육군보다 먼저 철군 했습니다. 수나라의 1차 고구려 침공은 준비가 잘된 고구려의 승리로 끝납니다. 수나라는 작은나라 고구려에 패했다는 망신을 당하고 고구려에 자신감을 심어줍니다. 수 문제 양견은 중국을 통일한 걸출한 황제였으나 고구려에 패했다는 유일한 단점을 남기고 서기 604년 사망합니다.

수나라를 건국한 문제가 죽자 차남 양광이 즉위하는데 그가 수나라 2대 황제 수 양제입니다. 양광은 태자인 형 양용을 모함해서 태자 자리를 빼앗고 아버지 문제의 병 수발을 하던 아버지의 후궁 선화부인을 겁탈 했습니다. 아버지의 여자를 겁탈한 비밀이 탄로나자 위기를 느낀 양광은 아버지 문제를 살해하고 수나라 2대 황제가 되었습니다. 수 양제는 전형적인 고대사회의 독재군주 성향을 지녔고 또한 번뜩이는 혜안과 정치적 감각을 지닌 인물입니다. 수 양제는 부국강병을 위한 노력도 많이 했는데요 좀 살펴봅시다
1. 첫째 대운하의 건설입니다 황하강에서 장강(양자강)을 잇는 운하 3개를 (영제거 통제거 강남하) 건설합니다. 수 양제가 완성한 3개의 운하는 길이가 1900km 5천리 입니다. 이는 세계 3대 토목공사 중 [세계 3대 토목공사 : 피라미드, 만리장성, 대운하) 하나 입니다. 대운하는 물류 이동을 원활하게 하여 수나라 국력을 부강하게 했고 중원과 강남의 문화 교류가 이루어져 하나의 문화권을 만듭니다. 1400년 전에 만든 대운하는 그후에도 중국의 발전을 견인합니다.
2. 둘째 오래 방치된 법률을 새로 고쳐서 시대의 흐름에 맞는 법률을 제정합니다. 우리나라 조선의 헌법 경국대전을 만들때 참고한 명나라 법전 대명률도 수양제의 법전을 참고할 정도로 잘 정비된 법전입니다. 3. 셋째 고구려를 제외한 북, 서, 남 인접국을 모두 정벌 또는 스스로 복속하게 만듭니다. 거기에 더하여 만리장성을 증축 보완하고 국경 근처의 성곽도 정비 했습니다. 현재의 만리장성은 명나라때 완성된 것인데 이미 수양제 시절에 거의 대부분 완성되고 명나라 때는 오래된 부분을 보수한 것입니다. 위대한 토목공사는 독재자에 의해 완성 된다는 것은 역사의 진리인 듯 합니다. 고구려를 제외한 모든 주변국을 평정한 수 양제는 복종하지 않는 고구려 침공을 결심합니다. 이러한 수 양제의 등극은 고구려의 우환거리 였습니다.

수양제는 등극 후 8년 동안 착실하게 국력을 비축한 후 113만의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침략합니다. 수 양제가 고구려를 침략하던 612년 당시 까지 100만 이상의 대군을 동원하여 남의 나라를 침략 경우가 없었습니다. 즉 병력 면에서 세계기록을 세웠는데 1300년 동안 유지된 수양제의 기록은 1차 세계 대전 때 갱신됩니다. 이번에도 고구려는 철저한 준비를 합니다. 고구려는 5천의 기병으로 요하를 건너 적군의 병참기지인 회원진을 습격합니다. 수나라의 보급기지를 불태운 고구려는 청야전을 준비합니다. “청야전” 참 괴로운 작전 입니다. 들판을 불 태워 말먹이 풀을 없애고, 우물을 메워서 식수 차단, 고구려 백성들은 마을을 비운채 성안으로 들어가 군인과 합동으로 농성전을 대비합니다. 당시 중국의 인구는 6천만 고구려 인구는 300만 정도 추정됩니다. 즉 고구려는 20대 1의 극히 불리한 전쟁을 합니다. 작은나라 고구려 입장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청야전”은 승리해도 피해가 막심한 고육지책 입니다.

612년 음력 1월 출발한 수나라 군대는 두달 후 요하를 넘어 옵니다. 하지만 요하를 수비하던 1만의 고구려 기병의 공격을 받은 수나라 군대는 강을 건너는 댓가로 막대한 피해를 당합니다. 게다가 요하를 넘어 온 수나라 100만 대군은 요동성에서 6개월 동안 발이 묶입니다. 요동성에서 벌어준 6개월의 기간 동안 고구려 총 사령관 을지문덕은 압록강 이남의 수비 대책을 완벽하게 세웠습니다. 하지만 뛰어난 전략을 펼친 것으로 추정되는 고구려 요동성 성주의 이름을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패배한 중국의 장군들 이름은 전부 기록에 있는데 승리한 요동성주의 이름은 기록이 없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사실입니다.

요동성에서 6개월 동안 발이 묶인 수양제는 마음이 급해져서 30만 별동대를 편성하여 압록강을 건너 평양성을 향해 진군 합니다. 한편 산동반도를 출발한 수나라 해군 제독 내호아는 영류왕의 동생 고건무의 유인책에 걸려 육군이 압록강을 넘을 때 이미 해군은 대패를 당했습니다. 해군의 지원이 없는 수나라 육군은 식량부족으로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후 을지문덕 장군의 계략에 걸린 수나라 30만 군대는 청천강 전투에서 (살수대첩) 전멸합니다. 이렇게 수 양제의 고구려 침략은 실패로 끝나고 그후에도 두번 더 고구려를 침략하지만 모두 실패하고 수나라는 결국 멸망합니다.

다음 이야기
수나라의 4차례 침략을 막아낸 고구려는 또 다시 당나라의
침략을 받고 엄청난 고통을 받습니다. 고구려 당나라의 전쟁과 백제 신라의 생존 투쟁 다음 시간에 살펴봅시다.

전 종 길
영남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前 (주)대은영상 대표,
現 아마추어 사학가 활동,(주)하나로 축산 대표
Kakao talk ID : jeonjongkil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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