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April 26,Friday

가난을 벗어나는 법

어제까지, 남방 팔꿈치 부분이 해진 줄 모르고 다녔다. 곧 큰 구멍이 날 기세였는데 그런 줄도 모르고 팔을 흔들며 다녔다. 직장 동료들에겐 팔을 올려가며 인사했고 커피를 들고 마실 때마다 팔꿈치가 구부러지며 아슬아슬하게 피부가 보였다 말았다 했을 테다. 아무려면 어떤가, 아무 일 없는 듯 넘어가면 될 일이지만 뒤늦게 부끄러움이 몰려온다. 모르면 몰랐겠지만, 알고 난 다음 왠지 칠칠치 못한 사람이 된 것 같아 영 마음이 편칠 않다. 누군가는 눈치채지 못했을 테고 또 누군가는 나를 꽤나 어지간한 사람이라 여겼을 테고 더러는 안타깝게 봤을 터. 그런데 곰곰이 생각하니 해진 남방에 나는 왜 부끄러울까 싶은 것이다. 해진 옷을 입은 사람을 사람들은 왜 안타까워하는가, 궁핍과 가난은 왜 측은한가, 가난한 사람 취급 받는 건 왜 기분 나쁠까? 굳이 기분 나쁠 이유도 없는데 말이다.

가난은 인간의 발명품이다. 인간이 차곡차곡 쌓아온 근대적 욕망이 그 발명을 도왔다. 싸구려 옷의 해진 팔꿈치가 신경 쓰이기 시작하면 그것은 가난이다. 구두 앞 굽은 뭉텅해지고 마모된 뒷굽이 신경 쓰이면 그건 가난이다. 그것이 신경 쓰이게 만드는 사회에서 가난은 비로소 작동한다. 허름한 옷차림을 얕보는 사회에서 가난은 출발한다. 가난을 벗어나는 단 한 가지 방법은 가난을 신경 쓰지 않는 것이다. 아무리 궁핍해도 궁핍함이 신경 쓰이지 않으면 그것은 가난이 아니다. 가지지 못해 부끄러워하고 가진 자를 부러워하는 순간 그 사람의 온
세계는 상실감으로 가득 찬다. 상실감은 욕망을 촉발하고 그 욕망에서 벗어나려면 육체적으로 죽거나 정신적으로 죽는 수밖에 없다. 상실감의 인간은 상실감 없는 인간을 지향하지만 그것은 죽을 때까지 채워지지 않는 공허한 환상이다.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욕망의 사람들, 오늘 ‘상실의 시대’는 필연적인지도 모르겠다. 상실의 인간은 지배하기 수월하다. 인간은 이렇게 효과적으로 지배의 메커니즘 속에 인간 스스로를 가둔다. 지금 나보다 더 가진 자가 부럽거나, 자신을 가난하다 여기고 있는가? 어쩌겠나, 그대는 가두어진 인간이다.

생각을 이어가면, 가진 게 있고 없고, 신분이 높고 낮음을 떠나, 남자와 여자를 구분하지 않는, 있는 그대로의 사람과 세상을 보는 게 점점 힘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인간과 인간 사이, 대상과 인간 사이에 값 매겨지는 무언가가 틈입해 서로의 진가를 제대로 알아보기 힘들 게 만든다. 말하자면 사람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전락시키는데 그것이 바로 페티쉬, 물신성이다. 인간은 숭배의 대상을 끊임없이 발굴해낸다. 신, 왕, 국가, 체제, 화폐 같은 것들, 그 중 오늘날 인간의 페티쉬는 돈이다. 돈은 교환가치다. 인간이 화폐를 발명한 이후로 돈은 인간에게 맹목이 됐다. 개인적인 교환가치가 높을수록 상품화된 인간으로서 현금성은 높아지고 안락한 생활이 가능하므로 만인은 자신의 교환가치 향상을 향해 질주한다. 황폐화된 인간의 광범위한 확산, 교환가치의 인간이다. 즉 점수, 등수, 기준, 통계 등의 합리성 범주 안에 들어온 자들을 선별하고 구분하는 세계에서는 범주에 더는 들어가지 못한 자들을 필연적으로 차별하거나 다르게 하는 방식으로 배제하고 억압한다. 대학 가야 사람이고 취직해야 인간 되는 세상에서 대학가지 못한(않는) 사람과 취직하지 못하는(않는) 사람들, 그리하여 가난이라는 사회적 형태 속에 내몰린 사람들이 당하는 수모를 생각하라. 그들은 조금 둘러가는 사람들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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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은 굶어 죽지만, 결코 가난해지진 않다. 인간은 가난을 신경 쓰고 자책하여 스스로 죽을 수도, 누군가를 죽일 수도 있다. 먹을 게 없어 배고프지만 한 조각 빵에도 존엄을 유지할 수 있다면 그는 가난하지 않다. 더 많은 월급에 이리저리 전전하며 더 벌지 못해 안절부절못하는 사람은 아무리 많이 벌더라도 머릿속에 콕 박힌 부족함, 상실감의 ‘가난’을 벗어날 수 없다. 오로지 조금이라도 월급 더 주는 회사가 있다면 여지없이 옮겨가며 자신의 삶을 돈 속으로 구겨 넣는 사람은 가난도 함께 따라다닌다. 돈벌이만 된다면 어디든 기웃거리는 사람들은 경박한 궁핍 속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돈을 잡고 있으면 돈에 잡힌다. ‘적게 소유하는 자는 그만큼 남에게 덜 소유’ 당하지만 많이 소유하고도 남에게 온전히 소유 당한 자는 자신의 소유를 스스로 폄하할 수밖에 없다. 해진 옷에 영원히 당당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무리 고소득을 구가하는 사람이라도 더 채우려는 욕심과 뿌리 깊은 노예성을 덮어쓴 사람은 ‘절대가난’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가난은 복종과 굴욕 그리고 부자유와 닿아 있다. 돈의 시혜에 과감하게 자신의 자유를 내버릴 수 있는 사람은 가난한 자다. 노예의 가난은 궁핍한 빈곤이 아니라 시키는 일만 하는 복종에 자신의 삶을 모두 갈아 넣어야 하는 부자유가 그를 가난하게 만든다. 그런 면에서 보면, 노예와 월급쟁이의 부지런함은 자유로운 삶에 대한 적극적 외면이다.
복종에서 오는 일종의 안온함을 부지런함으로 지키려는 안타까운 의지, 이때의 부지런함은 결코 미덕이 될 수 없다. 결정의 피곤함, 자유의 위험을 애초에 모면하려는 비겁한 은신 같은 것이다. 스피노자는 그래서 이러한 삶의 위험에 맞서 싸우는 개인의 강인함을 강조하며 힘들고 드물지만, 자신의 욕망에 솔직한 것이 유일한 도덕이라 칭송했는지 모른다.

살 줄 아는 사람은 많이 가졌다고 행복해하지 않고 적게 가졌다고 불행해하지 않는다. 많이 가졌든 적게 가졌든 다 살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 행복과 불행이 외부의 상황과 여건에 흔들리지 있는 내적 단단함으로 삶을 받아들이는 자세, 그것이 다 사는 것이다. 제 가진 것을 자랑하는 자는 가난한 사람이다. 다시 한번, 가난은 가지지 못한 것이 신경 쓰이기 시작하는 순간 생겨난다. 가진 걸 자랑으로 삼는 사람은 끊임없이 가져야 하고 더 많이 갖지 못해 늘 부족하다 느낀다. 비교우위를 쉴 새 없이 재단해야 하고 없는 비교대상을 만들어서라도 찾아내 비교해야 안심한다. 더 가지지 못한 것을 끝없이 부끄러워해야 더 가진 것을 끝없이 부러워해야 하는 불쌍한 자들이다.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은 불행할 거라 짐작한다. 가장 어리석은 착각이 아닌가. 사람에겐 꼭 같은 무게로 빛과 어둠이 존재한다. 그것은 부자든 가난한 자든 마찬가지다. 끝없는 욕망으로 하나뿐인 인생을 허비하고 있는 사람은 잡히지 않는 언젠가의 빛을 위해 지금, 어둠의 계곡을 행진하는 자들이다. 그 어둠이 언젠가 자신을 구원해 줄 것으로 믿는 아둔한 사람에 불과하다. 마찬가지로 가난이 신경 쓰이고 생김새에 주눅이 들고 키, 능력, 사는 곳 같은 것들을 비교하고 부러워하고 부끄러워하는 순간 삶은 여지없이 불행의 태풍 안으로 빨려 들어갈 것이니, 지나는 개에게 인생을 배울 일이다.

나는 가난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돈을 쫓아 내 삶을 송두리째 욱여넣어 부를 획득했더라도 그것은 또 하나의 가난임을 안다. 아무리 재산이 많더라도 반대로 아무리 재산이 없더라도 돈이 자신의 삶을 결정하는 기준이 된다면 재산이 많건 없건 그는 가난하다 말할 수 있다. 해진 남방이 신경 쓰이지 않는 순간, 제 자신의 자유를 갉아먹는 세상의 칭찬을 과감하게 거부하는 순간, 또 하나의 작은 자유를 되찾게 된다. 세상을 이기는 연습이다. 알지 않는가, 작은 성공의 누적이 승리다.

장재용
E-mail: dauac9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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