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April 26,Friday

건강이 제일?

갑자기 허리가 아파왔습니다. 3주 전 저녁 손님들과 더불어 식사하며 환담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그 다음 날부터 허리 통증이 심하게 시작되었습니다. 자리가 양반자세로 앉는 곳이었는데 지속된 불편한 자세가 이유였던 듯합니다. 머리를 감고 옷을 갈아 입기도, 출근을 위해 차를 타고 오를 때도 고통스러웠습니다. 먼 거리의 행사는 취소해야 했습니다. 디스크일지 모른다고 하루하루 염려를 키워가는 아내의 성화에 떠밀려 병원에 갔습니다. 여기저기 눌러보며 통증자리를 확인하던 의사 왈, 급성요추염좌랍니다. 쉽게 말해 허리를 ‘삐었’답니다.
급성요추염좌는 허리에 무리가 되는 자세나 습관, 특정한 행동이 반복되게 되면 허리의 근육이나 안대에 피로가 쌓여 한계치에 달하게 되는데 이 때 특정한 계기를 만나면 당하는 질환이라고 어떤 한의원 원장님이 유투브에서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 걸 들었습니다. 물론 특별한 계기가 없어도 발생할 수가 있답니다.

아파보면 건강하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다 잃는다’ 라는 표현이 새삼스럽지 않게 다가옵니다. 그런데 정말로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다 잃어야 하는 것일까요?
우리나라에 격언처럼 쓰이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돈을 잃으면 조금 잃는 것이요, 사람을 잃으면 많이 잃는 것이며, 건강을 잃으면 전부를 잃는 것이다.’ 어떤 일화에 등장하는 이야기입니다. 한 성공한 기업가가 강연회를 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강의를 듣기 위해 운집했습니다. 기업가가 말했습니다. 내 재산은 아마 천 억 정도 될 것입니다. 그는 칠판에 1천 억을 숫자로 썼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돈이 아무리 많아 ‘0’이 수없이 달린 재산을 가져도 그것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은 가장 앞에 있는 ‘1’이란 숫자입니다. 그 1이 없다면 뒤에 나열된 0은 그냥 0일뿐입니다. 그 1이 무엇일까요?
예화에서는 그것을 건강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을 지키지 못하면 나머지가 헛되다는 것이지요. 머리가 절로 끄덕여지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불편한 진실이 있습니다. 건강은 우리가 건강하고자 하여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저는 허리가 약합니다. 설계하는 직업으로 오래 일하면서 좋지 않은 자세에 길들여진 데다 허리에 쉽게 무리가 가는 체형인 것을 알고 있었기에 주의를 기울이는 편입니다. 그런다고 질환이 저를 봐주거나 찾기 전에 예고해 주는 법은 없습니다. 만일 주의해서 건강을 지킬 수 있다면 건강민감공화국인 대한민국은 OECD 국가 중 최고의 건강지수를 자랑해야 합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합니다. 건강이란 것은 노력으로 어느 정도 유지할 수 있지만 노력만으로 건강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건강을 잃는다고 해서 모든 것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소개한 일화의 ‘1’이 건강이 아니라 다른 것이 될 수도 있어야 합니다. 만일 이 말이 사실이 아니라면 아픈 사람은 인생의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억지입니다. 건강을 제일로 아는 건강중심사회가 만들어 낸 편견이며 차별의 이념입니다.

건강은 잃지 않기 위해 준비한다고 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물론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정기적인 운동과 식단을 관리하는 등의 활동은 상당히 중요하고 효과적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절대적인 요소는 아닙니다. 우리는 누구보다 건강을 자랑하던 이가 허무하게 세상을 떠나버리는 일을 여럿 겪어 왔습니다. 그러므로 건강을 유지하려는 노력이 중요하지만 그 노력은 건강을 보조할 뿐 보증하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건강을 잃으면 그 고통이 단순히 개인으로 끝나지 않는다는데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사회적 고통이 더해집니다. 그것이 개인이 겪는 육체적 고통을 더욱 고통스럽게 합니다. 아픈 자신을 불행하게 여기게 하기 때문입니다. 건강을 잃으면 마음의 여유가 사라집니다. 자신을 돌보기에도 벅찹니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도 민감해지기 쉽고 섭섭하기도 하고 서럽기도 합니다. 나이 들어 거동이 불편해지는 우리 부모님들의 예를 보면 이해가 쉽습니다. 그 분들이 당하는 육체의 고통이 마음의 여유를 지우고 때로 불편에만 과도하게 반응하게 합니다. 그런데 건강하지 못한 개인의 아픔을 사회에서까지 구조적으로 느껴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이 사회적 고통입니다.

베트남에서 사는 교민의 예를 들자면 아파도 병원에 가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보험이 안될 뿐 아니라 병원비가 가져오는 경제적인 부담을 이겨낼 방법이 없을 때 그렇습니다. 한국에서 꼬박꼬박 건강보험료를 납부하고 있을지라도 바다 건너 나라에서는 온갖 한국의 보험증을 들이 대어봐야 먹히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비싼 진료비를 부담하며 한국병원을 찾기도 어려우니 ‘아프지 말하야 해’를 다짐처럼 반복하게 됩니다. 타향살이의 아픔 중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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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는 말로 돌아가 봅니다. 이 말이 실제적인 덕담이 되려면 ‘모든 것을 잃지 않기 위해서 건강해야 해’라고 말하는 것은 그리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말한 바와 같이 건강은 우리의 의지와 노력에 관계없이 어떤 기회로 쉽게 상실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제가 평상에 두시간 앉았다가 허리를 다치는 것처럼 어이없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의 보다 깊은 진의는 ‘건강을 잃더라도 모든 것을 잃으면 안 돼’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개인도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인이 건강을 잃어 당하게 되는 육체적 고통에 경제적 고통과 심리적, 정서적 고통을 얹어주는 사회는 개인이 많은 것을 잃게 하는 사회입니다. 이는 좋은 사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 사회는 건강한 이들을 위해서만 기능하는 차별과 편견으로 뭉친 사회입니다. 이것은 어찌할 수 없더라도 우리 개인은 건강을 잃더라도 모든 것을 잃으면 안 되도록 해야 합니다. 방법이 무어냐고 묻지는 마세요. 저도 허리 고통을 당하고 나서야 이런 생각을 시작했으니까요. 다만 다음 같은 생각은 갖습니다.

과부 사정은 과부가 안다는 말처럼, 아프면 아픈 이를 이해할 수 있겠구나. 아무렇지 않게 지나치던 보도의 턱이 고통을 지닌 이들을 불편하게 할 수는 있겠구나. 나처럼 허리가 아파 몸을 곧게 세우지 못하는 사람에게 엘리베이터의 보조레일은 꼭 필요하겠구나. 그러니 아파도 할 수 있는 일을 멈추지는 말자.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 다른 이를 이해하는 일, 그리고 서로 간에 좋은 영향을 나누는 일. 그래서 아픈 허리를 꼿꼿이 하고 442호 짜오칼럼을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멋있게 말해도, 격언과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들춰내며 흰소리 하 듯 떠들며 적어내도, 역시 아픈 건 아픈 겁니다. 타향살이, 부디 모두 건강하세요. /夢先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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