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April 26,Friday

한주필 칼럼- 어른의 빈자리

모친의 장례를 치르고 하루라도 빨리 일상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에 좀 서둘러 귀베길에 올랐는데 그게 마음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되지는 않은 듯합니다. 출국을 준비하는 마음부터 예전과는 달랐습니다. 모친의 빈 자리가 생긴 한국은 예전 그 모습으로 남아있지 않습니다. 또한 그런 자리를 떠나는 마음 역시 반드시 다시 돌아온다는 확신이 사라집니다. 

집을 그냥 비워두고 왔습니다. 어떤 식으로든지 정리하고 떠나면 다시는 돌아올 필요조차 느끼지 못할 듯하여 그냥 빈집으로 언제든지 돌아갈 여지를 남겨두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모친도, 일거리도 없는 한국에는 무슨 핑계로 돌아가나요? 

18살에 한씨 집안에 들어와 82년을 명실상부한 가장으로 집안을 이끌어오신 모친이 돌아가시고 난 후에야 가족이라는 개념에 대한 생각이 새삼스레 깊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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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자신의 고장에 깊게 뿌리내린 집안은 그런 걱정이 없겠지만, 저희 집안처럼 해방후 북쪽에서 기독교 박해를 피해 서울로 내려와 새롭게 자리 잡은 가족은, 탈북을 이끈 주도 세대가 사라지고 난 후 타향 땅에서 집안의 뿌리를 어떻게 내려야 하는지 하는 고민을 하게 됩니다. 다행히 장손이라도 함께 있다면 그를 중심으로 첫 세대가 내린 뿌리를 키우면 될 터지만 장손마저 글로벌 시대에 맞춰 외국에서의 삶을 택했다면 누가 그 역할을 해야 할지 막연하고 또 불안합니다. 즉, 집안의 구심점 역할을 하던 큰 어른이 사라진 가정에서 어떻게 가족의 정체성을 이어갈 것인가 하는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집안에 가장 큰 어른은 존재만으로 충분합니다. 집안에 어려운 어른이 계시다는 것은 가족 간의 있을 수 있는 갈등을 순화시켜줍니다. 참을 줄 알게 합니다. 내키지 않아도 양보하며 살게 됩니다. 행여 갈등의 골이 깊어져도 극단으로 치닫지 않습니다. 언제든지 어른을 중심으로 모든 가족이 함께 모여 의견을 조종하여 합의점을 만들며 우리가족이라는 개념을 키워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큰 보루가 무너지면 딱히 만나야 할 당면한 과제도 사라집니다. 만남이 뜸해지면 서로에 대한 관계의 제약도 풀리고 또 서로 관여할 이유도 희미해집니다. 형의 권위도, 동생의 권리 주장도 의미가 없습니다. 한 가족이라는 개념이 흔들리는 순간입니다.  

왜 어른들이 장남에 애착을 갖는지 뒤늦게 고아가 된 후에야 깨닫습니다.어른이 사라지고 나면 장남이 남은 가족을 이끌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장남은 리더쉽도 있어야 하고, 포용력도 있어야 하고, 경제적인 힘도 갖춰야 합니다. 장남이 재산을 많이 물려받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새로운 가족의 리더로서 남은 가족과 새롭게 생겨날 가족을 이끌고 가문의 전통을 이어가야 합니다. 가문의 전통이라는 것이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그 집이 가진 역사와 관습을 의미합니다. 집안의 역사에 담긴 비밀스런 이야기를 후손에게 전해주고 그것으로 가문의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누군가 그 일을 해야 하는데 아무도 훈련되지 않은 역할에 서로 얼굴만 바라봅니다. 그나마 집안에 재력이라도 빵빵하다면 그 재력을 중심으로 뭉칠 수 있지만 그런 재력도 없는 집안은 새로운 구심점을 만들 방안이 마땅치 않습니다.  

더구나 요즘같이 신구 갈등이 만연하고 집안에서도 부모 세대와 아이들 간에 정치적 이념이나 도덕적 가치관이 다른 시대에는, 마땅한 구심점이 사라진 가족은 명절에 한 번 모이기조차 어려워진다고 모두 혀를 찹니다.   

왜 가족이 필요한가 하는 질문처럼 우매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에게 국가가 필요하다면, 가족은 그 국가를 이루는 작은 단위입니다. 개인이 생겨나 가족을 이루고 그 가족들이 모여 국가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가족이란 가족원의 사회 훈련장일 수 있습니다. 사회의 일원으로 제 역할을 하기 위해 필요한 기초 교육과 훈련을 자연스럽게 해주는 곳이 가족입니다. 가족 간의 교류를 통해 사회성을 익히고, 상대에 대한 예절을 배우고, 집안의 행사에 참여하며 미리 사회 훈련을 합니다. 그렇기에 가족이란 국가 못지않게 중요한 조직입니다. 따라서 가족이 무너진 곳에 국가가 제대로 작동하리란 생각을 가질 수 없습니다. 

사람이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 역시 가족의 역사를 지킨다는 얘기인 듯합니다. 가족이 기억하지 않은 이름을 누가 기억하고 간직하겠습니까? 자신의 모든 역사가 가족과 함께 하기에 나라를 지키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이 가족을 지키는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가문을 지키기 위해 어떤 구심점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난제를 앞에 두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특별한 것이 없을 듯합니다. 

무조건 어른세대가 자꾸 만나고 대화를 나누는 것이 유일한 방안인 듯합니다. 가족에서 어른 역할을 하는 세대가 자주 만나고 대화를 나눈다면 자연스럽게 아래 세대 역시 배우게 되겠지요. 자주 눈을 마주하고 얘기를 나눠야 서로를 이해하고 가족으로서 사랑을 나눌 수 있게 되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사랑이 생겨야 가족간에 필요한 양보와 배려가 피어나겠지요.  

물론 누군가 장손의 역할을 할 리더가 있다면 더욱 순조롭게 흘러갈 것입니다. 

장자가 사라진 가족, 새로운 장자에게 바칠 팥죽을 준비해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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