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July 25,Sunday

호찌민의 심장! 역사를 간직한 거리 레러이 & 레라이

대표적인 관광지인 시민극장, 인민청사, 벤탄마켓 등을 잇는 레러이거리에는

수많은 명소들이 자리하고 있어 여행객들 사이에서 한 번 이상은 이 거리를 누비게 되는 것으로 유명하다. 호찌민에서 가장 오래된 거리 중 하나로 이미 여러 번 이름이 바뀐적이 있으며 1955년 3월 22일부터 정권에 의해 최종적으로 레러이(Lê Lợi) 거리라 불리게 된다. 낮에는 사무실, 빌딩, 쇼핑센터 등이 밀집된 지역답게 외국인들의 투자가 활발히 이루어지는 생동감 있는 거리로, 저녁 무렵에는 사이공 시민의 휴식처인 윙후에(Nguyễn Huệ) 광장과도 만나는 거리라 많은 이들이 한데 모여 산책 및 대화를 즐기는 여유로운 모습을 구경할 수 있다. 레라이거리는 총 길이 1km, 벤탄시장 로타리에서 시작하며 볼거리가 밀집된 곳으로 언제나 사람들의 흥미를 자극하는 길이다. 시내 중심으로 진입하기 위한 도로와 맞물려있어 늘 각양각색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일 새가 없으며 중간중간 이색적인 상점들 또한 이 거리에 생기를

불어넣으며 현지느낌을 충만하게 하기에 그만이다.

중국 명나라의 지배를 물리친 대범한 왕! 레러이, 그의 올곧은 기개를 엿보다

성명은 레러이, 시호는 고황제, 레타이또[1428~1433]라고도 지칭한다. 천년 이상 중국으로부터 지배를 받은 베트남은 이후에도 계속 침입을 당하는 수모를 겪는다. 명나라 제 3대 황제 영락제에 의해 베트남이 재정복되자 베트남인들 사이에서 저항운동이 일어나지만 내분으로 인해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였다. 한때 명나라 군대와 타협하면서 적절한 때를 도모하던 그는 지형을 이용한 게릴라 활동으로 1424년부터 게안·탄호아를 해방시킨 다음 북상하여 명군을 격파, 명군의 본토 철수를 조건으로 강화조약을 체결하여 베트남의 독립을 회복시키는 쾌거를 이룬다. 결국 1427년 하노이에서 즉위하면서 국호를 대월이라 정하면서 레왕조를 이룩한다. 농민들의 생활 안정 목적을 통해 기반을 확고히 하고자 토지대장과 호적을 재정비, 베트남 최초의 균전제를 실시하는 대범함을 보이기도 한다. 한편, 이전의 역대왕조의 불교 숭상 문화와 달리 유학을 국가의 지배이념으로 삼았고, 이 정책은 후대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이 점에서 레왕조의 성립은 베트남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하겠다.

목숨도 불사한 호위 장군! 한몸 바쳐 황제를 지켜낸 용맹무쌍 레라이 무사

레라이(Lê Lai)는 탄호아성 지역 므응(Mường)족 출신으로 레러이 황제를 보필한 용맹한 전사다. 부하사령관 레라이(Lê Lai)는 호위 장군으로 일생 황제의 안위를 지켰다. 1421년경만 해도 레러이의 부대가 명나라군과 맞설 정도로 강하지 않았을 무렵이다. 이는 탄호아 북쪽 찌린(Chí Linh)산 꼭대기에서 일어난 일로, 명군에 포위되어 꼼짝없이 죽을 수밖에 없는 일촉즉발의 상황. 이때 레라이가 명군을 가로 막고 목숨을 바쳐 왕의 부대를 탈출시켰는데 당시 그는 레러이 왕의 복장을 하고 명군의 눈을 속인 뒤 죽음을 각오하고 소수 자살특공대와 함께 결사항전한다. 그의 결단이 아니었더라면 황제는 물론, 휘하군사 모두 전멸할 수밖에 없는 통탄할만한 상황. 민중들은 이 두 영웅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매년 8월 21일과 22일 제사를 올린다. 참고로 당시부터 “21일은 레라이, 22일은 레러이”(Hăm mốt Lê Lai, hăm hai Lê Lợi)라는 말이 전해지는데 그 의미는 바로 두 사람의 제사일을 뜻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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