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October 23,Tuesday

하이든의 머리, 145년만에 귀환하다

 

1809년 5월 31일
전 유럽에 명성을 떨친 대 작곡가이자 ‘교향곡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1732 ~ 1809)’은 노환으로 인해 향년 77세의 나이로 오스트리아 빈의 자택에서 별세했다. 당시는 나폴레옹 전쟁이 한창이었던 때로 프랑스 군대에 의해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이 점령당해 국가 초비상사태였다. 어지러운 국가상황을 고려해 오스트리아 정부는 전국의 모든 장례식을 간소히 치르도록 선포하였고 하이든 역시 자신의 장례식을 절대로 성대하게 치르지 말라고 자식들에게 유언을 남기게 되었다. 따라서 하이든의 시신은 소박한 장례식을 마친 후 빈의 국립묘지가 아닌 공동묘지에 안치되었다.

도굴당한 머리
장례식을 마친 며칠 후 수상한 두 남자가 하이든의 묘지를 기웃거린다. 이들은 모종의 계획을 가진 듯 묘지 관리인을 매수하고 하이든의 무덤을 파헤치도록 요구한다. 그리고 하이든의 사체에서 머리만을 절단하도록 지시한다. 장례식을 마친 직후였기에 하이든의 머리는 아직 부패의 단계에 들어가지 않았던 상태. 수상한 두 남자는 묘지 관리인에게 하이든의 몸통을 관에 남겨둔 채 머리만을 절단해 꺼내 올 것을 요구한다. 도대체 왜 이런 무시무시한 일을 벌인 것일까? 개인적 원한 관계로 인한 사후 테러인가? 아님, 종교적 분쟁의 결과인가?
머리가 없는 시신
하이든의 장례식이 치러진 지 10여 년 후인 1820년.
고인의 열렬한 후원자이자 옛 고용주였던 ‘니콜라우스 에스터하지 2세’는 국가의 음악 영웅이었던 하이든의 시신이 공동묘지에 방치되어 있는 것을 더 이상 보다 못해 자신들의 가문 묘지로 이장할 것을 결심한다. 그런데 무덤이 발굴되던 날,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상상하지 못한 모습을 목격하고 사색이 되고 말았다. 세상에나… 시체의 몸통만 덩그러니 놓여 있는 관. 그제서야 하이든의 머리가 도굴당한 것을 알게 되었다. 에스터하지 가문은 발칵 뒤집히게 되었고, 가문의 수장인 니콜라우스 2세는 전면적인 범인 수색에 들어갔다.

밝혀진 범인
하이든 머리 도굴 사건의 범인들은 바로 에스터하지 가의 비서였던 ‘요셉 칼 로젠바움’과 외스터라이히의 주립감옥소장이었던 ‘요한 네포무크 페터’였다. 로젠바움은 자신이 섬기던 가문의 수장인 니콜라우스의 호된 추궁을 견디지 못하고 오래가지 않아 사건의 전말에 대해 실토하게 되었다. 순순히 하이든의 머리를 돌려주기로 약속하면서. 그리고 도굴의 이유를 ‘골상학’에 연관된 것으로 변명했다. 골상학이란 무엇인가? 이는 18세기 의학, 즉 근대 의학이 태동하던 시기에 유행한 분야로, 인간의 뇌 생김새를 연구하여 사람들의 지능이나 정신작용과의 연관성을 밝히던 학문이었다. -현대 의학에서는 거의 인정되지 않는 학문이다.- 골상학에 심취해 있던 로젠바움과 페터는 하이든의 두개골을 해부하여 뇌의 어느 부분이 어떻게 발달 하였기에 일생동안 천재적인 음악가의 삶을 영위할 수 있었는지를 밝히려고 했다는 것이다.

거짓말
니콜라우스 2세는 로젠바움과 페터에게 거금을 주고 하이든의 머리를 돌려받았다. 드디어 하이든의 유해가 에스터하지 가의 가족묘지에 평안히 잠들 수 있게 되고, 니콜라우스 2세의 근심이 사라지는 듯 보였다. 하지만 니콜라우스가 사망한 후 또 한 번의 황당한 스캔들이 터지는데… 돌려받았던 하이든의 머리가 다른 사람의 것임이 밝혀지면서 오스트리아 전역이 발칵 뒤집어진 것이다. 골상학에 미친 이 두 사람은 하이든의 머리를 도저히 포기할 수 없어 니콜라우스를 속였던 것이다. 하이든의 두개골을 연구하고 영구 보존하기를 원했던 두 남자. 그들의 말은 결국 헛소리가 아님이 밝혀졌다. 다분히 주관적이었던 그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하이든의 두개골은 인간의 청각정보 처리능력을 관장하는 ‘측두엽’과 감각신경원이 들어있는 ‘두정엽’ 부위가 더욱 발달되어 있었다고 한다. 얼마나 깊이 골상학에 미쳐있는 맹신자들이었기에 이런 엽기적인 행각을 벌일 수 있었을까?

법정소송
하이든의 머리를 통한 ‘골상학적 추적’을 어느 정도 완료한 로젠바움은 세월이 흘러 노쇠하게 되자 하이든의 두개골을 페터에게 전해 주기로 하고, 만일 페터가 사망하게 될 경우 빈 음악가협회에 기증하라고 유언했다. 그러나 페터의 관리 소홀로 인해 하이든의 머리는 엉뚱한 사람들에게 전달되어 기나긴 떠돌이 생활을 하게 되었다. 먼저 페터의 주치의 ‘칼 헬러’, 그 다음엔 의사 겸 병리학자인 ‘칼 폰 로키탄스키’의 수중에 들어가는 등 사방을 돌아다니던 하이든의 두개골은 우여곡절 끝에 빈 음악가협회에 기증되고, 협회는 박물관에 전시해 대중들이 관람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사실을 접하게 된 니콜라우스 2세의 후손 ‘파울 에스터하지’는 하이든의 머리가 대중의 눈요깃거리가 되는 것에 분개하고 빈 음악가협회에 머리의 반환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협회의 비협조 속에 사태는 법정 싸움으로 번지게 되었다. 소송은 더디게 진행되었고, 설상가상 나치의 오스트리아 합병과 두 차례의 세계대전 등으로 인해 하이든의 머리 반환 소송은 좀처럼 진도가 나갈 수 없었다. 끈질긴 노력 끝에 파울 에스터하지는 1954년 재판에서 승소하게 되고, 드디어 하이든의 머리를 찾아 올 수 있게 되었다.

드디어 귀환
1954년 6월.
마침내 하이든의 머리는 오랫동안 분리되어 있었던 제 몸통과 합쳐져 온전한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무덤에서 파헤쳐진 지 어언 145년 만에 귀환해 에스터하지 가의 가족묘지에 평안히 잠들게 된 것이다. 하이든을 추모하는 성대한 미사에는 당시 오스트리아의 대통령 ‘테오도르 코너’를 위시해 수많은 정치인들이 대거 참석해 오스트리아의 대 작곡가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의 영원한 안식을 기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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