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April 27,Saturday

브람스의 길

이상한 커플
1830년 6월 9일 독일 함부르크의 한 교회 결혼식. 혼례를 주관하는 목사 ‘알젠’은 신랑신부의 모습을 보고 의아해 한다. ‘뭔가 분명히 이상한데…?’ 경비대 군복을 입은 신랑 ‘야곱’은 젊은 청년이었지만 신부 ‘크리스티아네’는 한쪽 다리가 살짝 짧아 옆으로 약간 기운 모습이었다. 들은 바로는 신부가 신랑보다 17살 연상이란다. 야곱이 24살. 크리스티아네는 41살. 거의 엄마뻘되는 여인과 아들뻘되는 청년의 결혼식이라… 영 부자연스러운 장면이었다.
사실 야곱은 음악을 반대하는 부모 곁을 떠나 열 다섯살부터 홀로서기를 한 후 우여곡절 끝에 악단주자가 되었다. 하지만 수입이 불안정한 악사 생활로 항상 사는 게 곤궁했던 야곱은 자신이 세들어 살던 집의 여주인 크리스티아네의 당차고 생활력있는 모습에 반하고 말았다. 그리고 가정적이면서도 따뜻한 손길로 자신을 보살펴주는 그녀에게서 모성적 사랑을 느꼈던 모양이다. 용감히 청혼한 야곱을 보고 크리스티아네는 당황했지만, 불편한 몸 때문에 여자의 삶을 거의 포기했던 그녀로서는 너무나도 황홀하고 감지덕지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이 이상한 커플은 결혼을 하게 되었고, 정확히 3년 후 ‘요하네스 브람스’라는 아들을 얻게 되었다.

소년의 이중생활
브람스가 14살이 되었다. 아버지 야곱은 꾸준히 연주활동을 다니긴 했지만 한번도 생활이 나아지질 못했다. 게다가 나이 많은 엄마 크리스티아네는 이전에 지녔던 강인한 생활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브람스는 어려서부터 피아노 신동 소리를 들으며 여러 선생님들에게 수업을 받기 했지만 항상 레슨비에 쪼들려 수업을 길게 지속할 수 없었다. 학교 수업료와 레슨비 걱정 없이 살아보는 게 소원이었지만, 집안 형편을 훤히 알다 보니 부모님에게 손을 벌릴 수 없었다. 해서, 브람스는 스스로 음악공부를 위한 돈을 벌어야만 했다. 당시의 함부르크는 국제 무역으로 북적이는 항구도시였다. 브람스는 낮에는 학교에서 그리고 밤에는 항구가에 늘어선 선술집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며 생활했다. 겨우 십대 중반이었던 그가 시간당 가장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은 피아노 연주 뿐이었다. 소년이 감당하기엔 너무나도 고된 이중생활이었다. 쾌쾌한 담배 연기가 들어찬 술집에서 고주망태가 된 주정꾼들의 비위를 맞춰가며 건반을 두드려대던 브람스는 낮이면 학교 책상에 코를 박고 졸다가 밤이면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유흥가로 발걸음을 옮겨야만 했다. 낮밤을 가리지 않고 학교생활, 악기연습, 그리고 생활고에 시달리던 소년 브람스는 이내 쓰러지고 말았다. 거의 몇 개월 동안 병상에 누워 있게 된 브람스는 생각을 했다. 학업을 계속 할 것인지, 아니면 음악을 계속해 연주 실력도 쌓고 더불어 집안에 제대로 보탬이 될 것인지를 두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래도 결정은 빨랐다. 브람스는 학교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의 나이 이제 열 다섯 살. 그는 그렇게 본격적으로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기 시작했다. 덕분에 점점 더 음악의 바다에 빠져살 수 있게 되기도 했다.

거장 ‘슈만’을 만나다.
타고난 성실성과 근면함을 지닌 소년 브람스는 열심히 피아노를 쳤고, 죽기 살기로 돈을 벌었다. 피아노 연주와 작곡에 매진하던 그 때, 그의 앞에는 한 중대한 만남이 기다리고 있었다. 브람스의 진가를 알고 있던 헝가리 출신 바이올리니스트 ‘요아힘’의 주선으로 당시 유럽 최고의 작곡가 ‘로베르트 슈만’을 알현 할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1853년 9월.‘빌커슈트라쎄’에 있는 슈만의 집에 도착한 브람스의 심장은 가슴을 뚫고 나올 정도로 쿵쾅거렸다. 초인종이 울리고 문이 열렸다. 잔뜩 긴장해 어깨를 비정상적으로 움츠린 청년 브람스와 요아힘의 전보를 받고 브람스를 기다리고 있던 거장 슈만. 브람스를 맞이하는 슈만의 행동은 뭔가 어색했지만, 곧장 자신의 그라프 피아노(몇 년뒤 브람스가 물려받음)로 브람스를 안내했다. “그래, 뭘 연주해 줄텐가?” “………..” 대가를 마주한 브람스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가락을 진정시키고 자신이 처음으로 작곡한 <피아노 소나타 제1번>을 연주했다. 슈만은 자신의 눈과 귀를 의심했다. 도저히 처녀작이라는 말을 믿을 수 없을 만큼 견고하고 완성도 높은 작품이었다. 마치 ‘베토벤’이 환생한 것 같았다. 그것은 당시의 유행에 휘둘려 얼기설기 짜깁기한 아이디어가 아닌, 과거(독일 전통)의 음악에 대한 깊은 존경과 긴 명상이 응축된 음악이었다. 슈만은 직감했다. 이 청년의 음악이야말로 독일 음악의 새로운 방향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슈만은 정확히 두 달 후, <음악신보>라는 음악전문지에 ‘새로운 길, 요하네스 브람스!’ 라는 타이틀로 거창하게 브람스를 홍보하게 되었다.

슈만의 <새로운 길>, 약이었나 독이었나?
<음악신보>는 슈만에 의해 창간된 유럽 최고 권위의 음악 전문지였다. 특집 기사 ‘새로운 길’에서 브람스는 이 시대의 새로운 기쁨이며 음악 예술의 축복으로 도래한 ‘메시아’, ‘제2의 베토벤’인 것처럼 그려졌다. 이를 본 브람스는 아주 심각했다. 자신은 슈만의 표현처럼 하늘이 내려준 천재가 아니라 어린 시절부터 온갖 역경과 싸우며 치열하게 음악의 곁을 지켜온 평범한 음악가였기 때문이다. 슈만의 이런 황당하고 과장된 기사는 브람스에게 엄청난 부담감으로 다가왔다. 이제 음악계의 시선이 온통 자신에게 향할 텐데… 브람스는 깊은 고민에 휩싸였다. 그리고 궁금했다. 슈만은 어쩜 그렇게 허무맹랑하고 극단적인 표현으로 자신을 알리려고 했는지. 그런데 슈만을 알현한 후 한 달 동안 그의 집에서 수업을 받으며 겪은 일들을 돌이켜보니 이상한 점이 많았다. 사람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않는 것, 혼잣말로 자주 중얼중얼 거리는 것, 웃기지 않은 일에도 목청 높여 깔깔거리는 것, 그리고 종종 갑자기 사라져 방에서 옴짝달싹하지 않던 것. 아!! 그랬던 것이다. 곰처럼 무던한 브람스는 기민한 사람이라면 단번에 알 수 있었던 슈만의 정신질환을 한 달이나 지나 확신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미 물은 엎질러진 상태였다. 슈만이 주체할 수 없는 감정과다에 빠져 표현한 그 <새로운 길>을 스스로 열어 갈 것인지, 아니면 지레 겁을 먹고 주저 앉을지는 모두 브람스에게 달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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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람스만의 길
브람스의 음악과 삶은 정확히 들어맞는 데칼코마니처럼 서로 닮아 있다. 슈만이 표현한 ‘새로운 길’이 결코 과장되거나 허무맹랑한 것이 아니었음을 브람스는 전 일생을 통해 보여주었다. 그는 고전적인 음악적 관념을 철저히 따르되 그것을 자신만의 낭만적인 언어와 절충시켜 결국 <고전주의적 낭만주의>라는 새로운 음악세계를 구축한 대가가 되었다. 그는 철저한 자기검열방침을 통해 생존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음악들은 가차없이 파기 해버린 용단 있는 사람이었다. 또한, 자신의 양심과 자존심에 부합하는 음악이라면 몇십 년 세월도 기꺼이 투자하는 지구력 끝내주는 사람이었다. 브람스는 사람에 대한 신의가 깊은 사람이었다. 정신병원을 전전하던 스승 슈만이 사망한 이후 그렇게도 흠모하던 클라라 슈만의 곁에 드디어 다가갈 수 있게 되었지만, 그는 그녀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플라톤적인 것으로 승화시켰고, 죽을때까지 그 숭고함을 훼손하지 않은 신실한 사람이었다. 평생 독신으로 지낸 그는 자신의 재산 대부분을 가난한 음악가들에게 환원한 후 생을 마감할 정도로 깔끔한 사람이었다. 그렇다. 브람스는 누가 뭐래도 흔들림없이 자기만의 균형과 절도, 원리와 신념을 가지고 묵묵히 생을 걸어간 그런 음악가였다.


김 지 희

강원대학교 사범대학 음악교육과 졸업(교육학 학사) / 미국 맨하탄 음악 대학원 졸업(연주학 석사) / 한세대학교 음악 대학원 졸업(연주학 박사) / 국립 강원대학교 실기전담 외래교수(2002~2015) / 2001년 뉴욕 카네기홀 데뷔 이후 이태리, 스페인, 중국, 미국, 캐나다, 불가리아, 캄보디아, 베트남을 중심으로 연주활동 중 / ‘대관령 국제 음악제’, 중국 ‘난닝 국제 관악 페스티발’, 이태리 ‘티볼리 국제 피아노 페스티발’, 스페인 ‘라스 팔마스 피아노 페스티발’ 《초청 피아니스트》 E-mail: pianistkim8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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