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December 4,Friday

‘서광’ – 프리드리히 니체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 지음
(참고한 책: ‘서광’ 프리드리히 니체 저,이필렬 옮김, 청하, 1983.01.01)

서광, ‘아침놀’이라고도 번역되는 이 책은 니체가 오랜 투병생활의 막바지에 나온 책이다. 건강했을 때의 니체가 아닌 ‘병든 니체’가 써낸 첫 번째 책인 셈이다. 니체는 많은 저서를 남겼지만, 니체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1880년 세상에 나온 ‘서광’ 그러니까 죽음 앞 어둠까지 갔다가 다시 살아온 니체, 인류의 니체로 거듭나는 시점을 ‘서광’이 출판된 이후로 보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주옥 같은 저작들이 이때부터 출간되기 시작한다. ‘즐거운 학문’(1882),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85), 니체의 철학적 윤곽이 가장 잘 드러나 있는 ‘선악을 넘어서’(1886)가 모두 이 시기의 주요한 작품이다. 문체에서도 보다 과감해진 니체를 발견할 수 있다. 정신적 고통의 극한까지 다녀온 뒤 그의 ‘관점’이 조금 달라졌기 때문일 테다. 그렇다, ‘서광’은 우리의 관점, 편협하고 나약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퍼스펙티브에 관해 말하고 있다.

‘이 책에서 사람들은 지하에서 작업하고 있는 한 사람을 보게 될 것이다. 그는 뚫고 들어가고, 파내며, 밑을 파고들어 뒤집어엎는 사람이다.’ 책의 서문에서부터 니체는 무언가를 단단히 벼르고 있는 사람 같다. 그가 손보려는 사람은 누구일까? 그가 벼른 것은 다름아닌 도덕이다. 뒤집고 파고들려 하는 것 땅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관점으로 재단했던 모든 가치 즉 종교적 금욕, 도덕적 금기다. 태어나 온전했던 한 인간을 옥죄고 가두고 교육시키고 참회시키며 마침내 자신의 생각을 버리게 하고 세상의 가치를 각인시켜온 인간 역사의 무근거성을 파헤치는 시도다. 가치의 가치를 전복시키려는 시도일 텐데 ‘시대정신’, ‘도덕’, ‘관습’ 같은 것들에 대항한 본격적인 개전을 니체는 이 책에서 선포한다. 힘든 싸움이 될 줄 알았던 나머지 그는 ‘나의 말은 내가 죽은 뒤 100년이 지나야 알아먹을 수 있을 것’이라는 예언도 해놨던 터였다. 그야말로 그랬다. 이 책의 출판 이후 니체는 세간의 비난에 시달려야 했고 그마저도 팔리지 않아 굴욕을 맛봐야만 했다.

‘서광’으로 들어가자. 그가 책에서 ‘인간의 머릿속의 논리는 어디에서 유래한 것일까? 그 영역이 원래 엄청나게 광대했던 비논리에서 생겨났음이 분명하다.’ 고 말할 때 이미 인간이 세운 가치 일반을 불신하고 있다. 나는 그의 말에 동의한다. 논리는 얼핏 보편적이고 과학적인 것 같지만 그 내면에 지독한 유아론을 품고 있다. 진리보다 작은 사실, 과학, 논리로 무장하고 진리와 싸우려는 아이처럼 굴 때 의젓한 인간은 아직 어린 논리적 인간에게 수사학적 전회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니체는 근거의 무근거성을 들며 차분하게 결혼 제도부터 ‘까기’ 시작한다. ‘정열에 불타올라 사랑한 두 사람에게
영원한 사랑, 영원한 정열의 의무를 지우는 결혼제도는 그 자체로 얼마나 정열의 본질을 거스르는가. 돌발적이고 일회적인 약속에서 영원한 의무를 창출해낸 제도들과 풍습들을 생각해보라. 그것들은 인간적 덕성이기는 커녕 모두 인간적인 것을 넘어서는 요구들이다.’ 나는 박수를 쳤다.

니체 앞에선 종교도 빠져나가지 못한다. ‘고상한 지식계급, 왠지 안에 뭔가를 가지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사제들, 종교의 기원은 의견을 계시로 바꿈으로서 사상의 승리를 거두려는 자기 스스로도 속는 종교적 인간의 책략과 관련이 있다.’ 지적하는데 ‘자기에게 벅찬 환희를 불러오는 하나의 가설 내지 의견을 신에게 돌리고 정작 그 자신은 생각의 주인인 신의 도구 내지 수단인 것처럼 낮추지만 사실은 자기 생각을 신의 것으로 만듦으로써 어떤 비판이나 회의도 허용하지 않는, 그런 절대적 승리를 거두려는 것이다.’ 고 말하는 니체는 예리하다. 그는 종교를 두고 앞서 언급한 결혼제도 같은 불합리한 도덕적 가치들과 상부상조하고 있다고 말하는데 ‘성직자들은 도덕적인 괴로움에 의미를 부여하며 그것을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어준다.’ 말인즉 종교는 도덕의 진통제 역할을 자처하며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파는 자, 온갖 종류의 다양하고 자연스러운 고통을 종교의 이름으로
생산하고 다시 팔아먹는 종교자본으로 간주하며 힐난한다. 종교인들에겐 ‘서광’의 일독을 권하지 않는 바다. 아니다, 진정한 종교인으로 거듭나려는 분들은 한번쯤 읽어봐야 함직도 하다.

니체는 철학을 욕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앞서 그는 전쟁을 하고 있는 중이라 하지 않았던가. 니체는 칸트가 자기 시대 도덕의 진정한 아들이었다고 말한다. 즉 시대의 도덕에 갇혀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칸트는 이성의 비판을 도덕 앞에서 자제시켰다.’ 그것은 칸트 자신이 원래는 나약한 인간 상이었기 때문에 사유를 끝까지 밀고 나갈 수 없었다고 말한다. 이렇듯 그는 철학을 비롯한 모든 가치, 도덕적 행동 뒤에 숨겨진 심리적 책략, 자아와 그 이면에 존재하는 무의식적 충동에 대한 분석, 인간 행동의 다양한 심리적 동기와 충동을 특정 분야에 국한되지 않고 성역 없이 추론했던 것이다.

그가 칸트 사유체계의 빈약함을 지적하며
남긴 말이 두고 두고 머릿속에 남는다.

“우리가 감각을 통해 사물을 재는 한 오류는 불가피하다. 감각은 자주 우리를 속이기에 감각을 통하는 한 우리의 인식세계란 우리를 한가운데 가두어둔 감옥과 다를 바가 없다. 그렇다고 감각을 제거할 수는 없다. 감각을 제거하면 세계도 사라진다. 이것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다. 실제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뒷길도 샛길도 없다! 문제는 해석된 세계가 아니라 세계에 대한 불행한 해석이다. 도덕적 세계 혹은 세계에 대한 도덕적 해석은 세계를 나쁘게 감각하는 방식이다. 그것은 선과 악, 원한과 복수, 죄와 벌, 양심의 가책 등으로 이루어진 병적 세계관이다. 살아 있는 존재가 자기 삶을 학대하다니, 그것은 오류라기보다는 질병이고 불행이다!”
(다음 시리즈는 니체의 ‘선악의 저편’이 이어집니다.)

장재용
E-mail: dauac9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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