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September 28,Tuesday

신분사회의 어두운 그림자 순장제도

지난 이야기
2천년 동안 지속된 순장제도는 수 백만명을 희생 시켰습니다. 변화를 거부하고 국가 멸망때까지 순장제도를 지킨 가야는 인구 부족으로 생산성 감소, 국방력 약화로 신라에게 멸망 당합니다. 또한 인도적 차원에서 유교 학자들의 순장제도 반대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기득권층의 욕심으로 순장제도의 반대가 많은 가운데 천년 동안 순장제도는 더 지속됩니다. 예나 지금이나 기득권층의 욕심으로 국민들만 힘듭니다.

결초보은이 기록된 배경
위과는 아버지 위주의 장례때 단 한명도 순장하지 않고 장례를 마칩니다. 장례 절차 도중에 동생 위기는 “형님 왜 아버지의 유언을 지켜 조희를 무덤에 넣지 않았습니까?” 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위과는 장례가 끝나고 동생 위기, 조희, 조희 아버지 세명을 불러놓고 자신의 생각을 설명합니다. “아버지께서 늘 조희를 아끼셨고 사람을 생매장하는 순장제도에 대해서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셨다. 그러나 마지막 가실때는 조희를 무덤에 넣어 달라고 하셨다. 나는 평소에 아버님이 하신 말씀이 진심이고 임종 직전에 하신 말씀은 정신이 혼미해서 하신 말씀이라 아버님 뜻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임금께서도 질문하셔서 오늘 너희들에 말한 내용과 같은 대답 드렸다” 듣고 있던 세 사람은 깊은 감명을 받습니다. 그후 위과는 노나라 원정군 사령관이 되어 전쟁터로 갑니다. 전투가 벌어지자 노나라 장수 두회가 워낙 용맹하여 위과는 연전연패 합니다. 위과는 아버지 위주에게 기도 합니다. “아버님 제가 죽는 대신에 전쟁을 이길 수 있다면 아버님과 가문의 명예를 지킬 수 있으니 제가 죽고 전쟁에서 이길 수 있도록 도와 주소서” 위과는 밤새 잠을 설치고 새벽 여명에 꿈결같은 소리를 듣습니다. “청초파”라는 말은 선명하게 기억나서 위과는 마지막 전투 장소를 청초파로 정하고 전군을 출동시켜 최후의 결전을 벌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적장 두회가 자꾸 넘어집니다. 그러자 위과는 아버지 위주의 혼령이 자기를 돕고 있다고 생각하여 두회에게 곧장 달려가 넘어진 적장의 목을 베고 마지막 전투에서 승리합니다. 그날밤 위과는 부하 장졸들과 승전 축하연을 벌이는데 조희 부녀가 찾아 옵니다. 조희의 아버지는 위과에게 말합니다. “저희 부녀는 항상 장군님의 은혜를 갚고자 생각 했는데 장군님께서 전쟁에서 고전한다는 소식을 듣고 사흘 밤낮을 달려 왔습니다 어제 밤새도록 적군의 진지 앞에 있는 벌판의 풀을 묶어 적군의 말과 병사가 넘어지게 만들고 새벽녘에 장군의 군막을 찾아 청초파를 세번 외쳐서 전투 장소를 알려 드렸습니다. 이는 장군님께서 제 딸을 살려주신 은혜에 만분지 일이라도 갚고자 했습니다” 이에 위과는 감격에 찬 대답을 합니다. “나는 아버님의 혼령이 도운줄 알았는데 그대 부녀가 나를 살렸구나 앞으로 나는 그대들을 가족처럼 생각하겠다” 이상 순장제도와 관련된 고사성어 “결초보은” 내용 입니다. 아마도 공자는 순장제도의 펴지를 염원하여 [결초보은] 내용을 춘추라는 역사책에 기록한 듯 합니다.

한반도의 순장제도
이제 우리나라의 순장제도는 어떤지 살펴 보겠습니다. 우리나라도 고조선 시대에 이미 순장의 흔적이 확인 되었습니다. 바로 만주의 대련에 (고구려의 안시성과 비사성 부근) 있는 강상무덤과 누상무덤 입니다. 1964년 발굴된 두 무덤은 고조선의 왕 혹은 고조선의 권력자 무덤으로 추정되는데 고조선의 대표 유물인 비파형 동검과 고조선 유물들이 많이 출토 되었습니다. 그중에 강상 무덤에는 140명이 함께 묻혀 있었고, 누상 무덤은 50명이 함께 묻혀 있었습니다. 강상무덤은 지금부터 약 2700년 전, 누상 무덤은 약 2400년 전에 조성된 것 입니다. 이는 당시 고조선에도 순장제도가 존재 했다는 것은 강한 권력자가 있었고 엄격한 신분질서가 존재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생매장의 흔적은 찾을 수 없으므로 순장 당한 사람들은 스스로 자결 했거나 강제로 살해 당한 후 주인의 무덤에 매장된 것으로 보여 중국의 순장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순장의 폐단을 없애기 시작한 신라
우리가 배운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 부여에는 순장제도가 있었다 라는 내용이 소개되어 당시 필자도 순장제도가 무엇인지 잘 몰랐습니다. 그리고 김부식의 삼국사기 기록을 살펴 봅시다. 고구려 동천왕의 장례때 많은 사람들이 순장을 자청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한 신라에도 왕이 죽으면 남녀 각 5명을 왕과 함께 순장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하지만 순장제도는 반 인륜적인 측면과 젊은 노동력을 희생시키는 국가적 손실이 발생 합니다. 따라서 순장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 삼국시대 초기부터 순장제도는 점차 축소되다가 서기 502년 지금부터 약 1500년 전 신라 지증왕 때 왕명으로 금지 시킵니다. 그러나 고구려 백제 신라보다 낙후된 가야는 멸망할 때까지 순장제도가 존재 했습니다. 가야의 무덤 중 2006년 발굴된 경남 창녕의 송현동 고분에 비교적 온전한 유골이 발굴 되었습니다. 유골을 분석한 결과 유골의 주인은 16세 소녀로 밝혀졌고 키 152cm 허리 19인치 팔등신 미녀로 추정합니다. 학자들은 유골의 주인에게 “송현이” 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습니다. 송현이의 무릎 뼈와 정강이 뼈는 심하게 마모가 되어서 5년 이상 앉았다 일어나는 노동을 과도하게 했던 흔적이 확인 되었습니다. 16세의 어린 송현이는 10대 초반부터 주인을 위해 뼈가 닳도록 일하다가 주인의 저승길까지 따라가서 봉사했네요. 송현이와 송현이 부모는 당시의 순장제도를 당연시 하고 죽음을 받아 들였을까요?

순장과 유목민족 (중국)
중국과 우리나라에는 사라지고 있던 순장제도가 거란족과 몽고에서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중국에서 순장제도가 늦게 유입된 이유로 늦게까지 유지된 이유도 있는 것 같습니다. 북방민족들은 사후 세계에서도 영화를 누리고 싶어서 시종 부인 첩 노비 등을 저승까지 데리고 가기도 하지만 불만 세력을 제거하는 수단으로도 사용 했습니다. 서기 916년 중국 송나라 때 요나라를 건국한 거란족 야율아보기는 중국에서 거의 사라진 순장제도를 부활시킨 인물입니다. 서기 926년 요나라 태조 야율아보기가 죽자 아들 태종은 너무 어려서 어머니가 섭정을 했는데 황제의 모후가 수렴청정을 하는 것을 반대하는 신하들은 태조 황제의 장례때 황후도 함께 순장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에 분노한 태후는 자신의 팔을 잘라서 자기 대신에 황제의 무덤에 넣고 자신의 수렴청정을 반대하던 신하 수 백명을 생매장 시킵니다. 죽어서도 주군을 섬겨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태후는 장례에 참석한 신하들을 강제로 생매장 시켰습니다. 그후 야율아보기의 왕후를 단완태후라고 (팔을 자른 태후라는 뜻) 부릅니다. 몽고의 경우는 더 심합니다. 몽고의 4대 황제 몽케가 죽자 (칭기스칸의 손자) 장례 행렬이 지나갈 때 구경하던 모든 사람들을 죽여 몽케 칸과 함께 묻었습니다. 당시 2만 명을 순장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무덤을 발굴하지 않아서 진실 여부는 모릅니다. 몽고 군사들은 장례때 만난 사람들을 죽이면서 “주군을 따라가서 모셔라” 라는 말을 하고 죽였다고 하네요.

한확의 딸이 명나라에서 순장당한 이유
그후 명나라 태조 주원장, 영락제, 홍치제 등 3명의 황제가 죽을때 수십명이 순장 되었다고 합니다. 영락제 순장 기록을 살펴 보겠습니다. 영락제가 죽을때 미녀 30명을 순장하라고 유언했는데 그이유는 당 태종 이세민이 죽자 이세민의 후궁 측천무후가 이세민의 아들 고종 이치의 후궁이 되고 나중에 왕후가 되면서 나라를 망친 역사를 예로 제시 했습니다. 영락제가 (주원장의 넷째 아들 주체) 죽자 후궁과 궁녀 30명을 선발하여 순장 시킵니다. 장례 당일 아침에 자금성 마당에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순장될 미녀들에게 마지막 식사를 시키는데 거부할 수 없는 미녀들은 울면서 밥을 먹고, 군사들은 30명을 동시에 목 매 죽입니다. 끌려가는 미녀들의 통곡이 너무 애절하여 보는 사람 모두 말도 못하고 눈물만 흘렸다고 합니다. 당시에 조선의 권력자 한확은 누이동생을 영락제의 후궁으로 보냈는데 순장 당합니다. 그리고 한확은 막내 누이를 또 홍희제의 후궁으로 보냅니다. 이렇게 두명의 누이를 명나라 황제로 보낸 한확은 출세가도를 달립니다. 그후 한확은 딸을 (인수대비) 세자비로 보내고 성종의 외조부가 됩니다. 조선의 선비들은 힘 없는 여성을 희생시킨 댓가로 부와 권력을 차지한 경우가 많은데 여러분이 한번 쯤 들어본 “홍살문” 에 대해 살펴봅시다. 당시 선비들은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남편을 모시지 않는다” 라는 사상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남편이 죽으면 아내가 자결하고 남편과 함께 합장되면 세워주는 “홍살문”은 가문의 자랑거리 입니다. 즉 변형된 순장제도 입니다.
홍살문이 하사된 가문은 토지 지급과 함께 면세 면역의 혜택이 주어집니다. 이러한 혜택을 받으려고 과부가 된 며느리를 살해하고 홍살문을 받은 사례도 많습니다. 하지만 정작 선비들은 정변이 일어나서 왕이 쫓겨나면 신왕에게 줄을 서는 선비가 대부분 입니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 자기는 해당없고 다른 사람들에게 강조할 뿐이죠. 언행일치가 없는 선비들 입니다.

다음 이야기
우리민족 최초의 통일 삼국통일을 살펴봅시다 80년간 벌어지는 치열한 경쟁을 통해 조상들의 지혜를 배우고 미래를 설계합시다. 내용이 좀 많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궁금하신 내용을 많이 소개 하겠습니다.

전 종 길
영남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前 (주)대은영상 대표,
現 아마추어 사학가 활동,(주)하나로 축산 대표
Kakao talk ID : jeonjongkil328

One comment

  1. 몽케 칸이 죽었을 때 지나가는 사람들을 다 몰살해서 약 2만 명 가량을 순장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하는데 그 기록의 출처는 어디입니까? 몽골비사? 아니면 황금연대기? 설마 동방견문록은 아니겠죠..?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This site uses Akismet to reduce spam. Learn how your comment data is processed.

Copy Protected by Chetan's WP-Copyprotec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