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December 2,Wednesday

봄날의 푸념

가 봄이 좋다고 했나.이름만 좋을 뿐이다.실제로 우리 몸은 봄을 미워한다.
봄철에는 한국을 갈 때마다 심한 감기 몸살로 한바탕 소동을 치른다.이번에도 어김없이 도착하자마자 들이닥친 불청객 감기에 잦은 기침으로 얼굴에 마스크를 한 채 노모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동생의 집을 찾았다. 마침 미국에 지내시다 노모의 생신을 이유로 한국에 들린 은퇴한 의사 형이 콜록거리는 동생을 보고 “다 늙은 탓” 이란다.나보다 12살이나 많은, 띠 동갑 형에게 늙었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세월이 흐른 모양이다.
아무튼 이번 감기가 장난이 아니다.너무나 몸이 괴로워서 일순간 죽음이 살짝 뇌리를 스쳐 지날 정도로 심각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거참, 글은 여전히 써야 한다.그래서 이런 푸념을 해댄다.

벌써 20년 가까이 베트남에 지내다 보니 몸의 세포는 이미 베트남의 열대성 기후에 동화되었는데 마음은 아직도 사시사철 기온이 수시로 바뀌는 한국 날씨에 머물고 있으니 봄만 되면 한국 산야의 초록이 그리워져 나도 모르게 한국으로 발길을 재촉하지만 밤과 낮의 일교차가 10여 도를 넘나드는 낯선 기후에 몸은 진저리를 치며 비명을 지른다.
밤이 되면 기침이 더욱 잦아진다.낮에 들린 병원에서 처방해준 감기 약을 먹고 묵직한 이불을 덮은 채 소파에 누워 TV를 보다 그대로 잠에 빠졌다.그리고 깨어나니 벌써 아침이 밝았다. 온몸이 땀으로 흥건하게 젖었지만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다.
시계는 새벽 5시를 가리키고 있다. 문 앞에 와 있는 조간 신문을 들고 책상에 앉았다. 이럴 때는 따뜻한 커피 한 잔이 제격인데 감기에 카페인이 별로 좋은 작용을 할 것 같지 않아, 어제부터 보온병에 담아둔 미지근한 녹차를 한 잔 마시며 신문을 펼쳐 든다.

한국은 지금 어떻게 돌아 가는가?
별로 궁금해 하는 모습을 보이기 싫다 .마치 관심을 보이면 더욱 콧대를 높이는 여인 같아 관심이 없는 척 돌아서보지만 그래도 여전히 뒤통수가 간지러운 것은 숨길 수가 없다.
그래 한번 보자 어찌 돌아가고 있는지.

신문 일면은 어제 대통령 주제로 장장 7시간에 걸쳐 열린 규제개혁회의가 톱을 장식하고 있다.
대통령이 직접 주제하여 전 국민에게 생중계로 보여준 회의는 신선했다. 그런데 야당의 반응은 질시 그 자체다. 손톱 밑 가시를 뽑는다고 손톱을 뽑아서는 안 된다는 논평은 그럴듯하지만 그 가시를 뽑는 장면을 국민에게 보여주는 것은 사전 선거운동이라며 이를 중계한 방송사를 규제하겠다는 발상은 국민의 눈을 가리는 규제를 새롭게 만들겠다는 말인가?꼭 그렇게 배 아픈 티를 지질하게 내야만 하는가?자신들은 모든 국민이 관심을 갖는 그런 분야에 아무런 아이디어도 없다는 말인가?

내가 야당이라면 이런 개혁안을 제안할 것이다.
우리나라가 가장 잘 한 안보정책은 전국민에게 주민등록번호를 부여한 것이고, 가장 독재적 통제정책 역시 주민등록번호다.이것이 양날의 칼이다.주민등록번호가 생긴 이후 간첩색출은 용이해지고 모든 국민에게 군번이 부여된 군대처럼 사회적통제가 가능해졌지만 반면에 이로 인해 모든 개인정보가 적나라하게 노출될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그런 위험은 이미 많은 분야에서 터져 나와 사회적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
남북대치라는 한국의 특수한 사정이 만든 일이라고 이해는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인터넷이 일반화된 이 시점에는 더욱 그렇다. 앞으로 주민번호 기록을 요구하거나 그것을 사용할 수 있는 기관을 엄격한 심사를 거쳐 반드시 공적인 필요성이 있는 곳으로 한정하는 역 규제 법안을제출하는 것이다. 회사를 포함하여 인터넷 사이트는 물론이고 모든 사적 집단에서 주민번호 요구를 금지시키고 신분증에 표시되는 방법 역시 일반인이 식별하지 못하도록 특수 문자나 암호를 사용하여 별도로 관리하게 만든다면 요즘 흔히 일어나는 개인정보유출로 인한 사회적 범죄가 대부분 사라질 것 아닌가? 관리 비용은 좀 늘어 날 수 있겠지만 개인인권 보호는 강화될 것이다.매번 입으로만 국민 인권보호를 외치지 말고 머리 좀 써보심이 어떠하신가?

신문 일면을 장식하는 또 다른 기사,대한민국 3대 이동 통신사의 하나인 SK텔레폰사의 시스템이 6시간 동안 불통이 되는 바람에 수백만의 가입자가 엄청난 불편을 겪었다는 기사와 그 회사 임원들이 단체로 고개를 숙여 사과를 하는 사진이 떴다.
우리나라 이동전화 시스템이야말로 각종 규제로 똘똘 묶어 소비자를 옥죄는 대표적인 규제개혁의 대상이다.전화기와 전화회사가 함께 묶여 다니고 전화를 개통하려면 반드시 개인 정보를 다 털어놔야 한다는 것이 문제다.전화기 회사는 전화기를 팔고 통신사는 통신 칩을 팔면 되는데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고 업무를 용이하게 하려고 전화기와 라인을 함께 묶어 팔며 개인 정보를 상세히 요구하는 것이다.이것은 소비자에게 서비스 선택권을 암묵적으로 제한하는 인권침해이기도 하다.한국의 순진한 소비자들 세상 돌아가는 것도 모른 체 그냥 그들의 농간에 놀아난다.외국인이 한국에 와서 가장 불편해 하는 항목의 하나가 바로 이동 전화 사용이고, 한국인이 외국에 가서 가장 놀라는 일 중에 하나가 용이한 이동전화 사용이다.
이것 역시 주민등록번호의 사용규제를 강화하면 개선이 가능하다.고객정보의 완성을 위해 통신사들은 고객 관리를 강화해야 할 것이고 묶이지 않은 고객을 잡기 위해 선불카드 판매를 포함한 다양한 서비스를 자연스럽게 제시하게 된다.결과적으로 소비자의 권리가 증가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관공서와학교,은행,전화, 신문 방송 가스 등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공적 사적 용무에 대한 연결고리가 주민등록번호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그래서 주민등록번호관리 시스템만 해킹하여 손에 쥘 수 있다면 대한민국 5천만의 개인 정보를 다 주무를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러고 보니 한국에는 군침이 날만한 먹이 감이 제대로 쌓여있는 셈이다.

쓰기 싫은 글을 쓰는 탓인지 아니면 감기 기운으로 그런지, 잔뜩 무거워진 머리를 잠시 들고 문득 내다 본 뒷마당에는 백색의 목련이 벌써 봉우리를 열었다.
봄이 되면 잎보다 먼저 꽃을 피우는 목련, 전장에 나간 왕자 생각에 긴 밤을 달래다가 이른 아침시종도 없이 혼자 마당에 나와 차가운 아침 공기로 마음을 달래고 있는 여왕과 같이 도도하고 외로운 순백의 꽃이다.
추운 겨울을 앙상하게 보내고 봄이 와도 잎새조차 따르지 않아 서러운 흰 백의 목련을, 감기 기운이 도질까 혹은, 중국에서 날아온 누런 황사가 들이칠까 두려워 창문도 열지 못하고 바라봐야 하는 잔인한 계절이 요즘처럼 덜 익은 봄이다.
가슴 아픈 상실을 통과하지 않은 수용이 없다고 하더니만 겨울을 통과하고 봄을 수용하는 대가가 고작 감기와 황사 라더냐?꽃 내음이 은은한 아지랑이 피어나는 봄날은진짜 오기는 하는 것인가?

계절이나 사회나, 몸도 마음도 다 정상이 아닌 어느 봄 날,감기로 반쯤 정신 나간 인간의 공허한 푸념이다.

작성자 : 한 영 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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