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June 19,Wednesday

한주필 칼럼- 하수의 서러움, 고수의 품격

골프장에서는 공 잘 치는 게 최고의 선(善)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누가 한 소리인지 따질 필요도 없이 누구나 다 인정하는 골프 계의 현상입니다. 물론 다른 영역에서도 해당 분야에서 가장 뛰어난 솜씨를 보이는 사람이 최고의 대접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골프에서는 이런 현상이 특히 심화되어 있는 듯이 보입니다.  

골프가 사교 행위로 활용되면서 사회적 신분이 제법 높은 사람이 동반자가 되는 경우 잠시 위계질서에 대한 혼란이 올 수 있습니다. 당연히 사회적 신분이 놓은 사람이 대접을 받는 모양새이긴 하지만 좀 지나다 보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 높으신 분의 골프 실력이 형편없는 경우 말입니다. 라운드가 진행될 수록 그 분의 말수가 줄어 들고 골프보다 다른 얘기가 자주 등장합니다. 골프가 자신에게 유리한 전장이 아니라는 것을 안 것입니다. 골프가 사회적 신분을 이기는 순간입니다. 이런 현상을 역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례도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마땅히 내세울 만한 신분이 없는 사람도 골프의 고수라면 골프장에서는 모두 그를 우러러봅니다. ‘그깟 사회적 신분 개나 줘라’ 하는 곳이 골프장인 듯합니다.   

이렇듯 골프는 사회적 지위에 앞선 가치를 자랑합니다. 적어도 골퍼에게는 그렇습니다. 그래서 필드는 고수의 천하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골프장에서 모든 대접을 우선적으로 받는 사람이 고수입니다. 4 명이 한 조를 이룬 만큼 자연스럽게 리더가 생기기 마련인데, 너무나 당연하게 고수가 그 역할을 합니다. 게임을 시작할 때는 고수를 중심으로 티 그라운드에 모이기 시작하고, 그날의 게임 방식을 정하는 데에도 고수의 영향력이 가장 큽니다. 플레이 도중 룰에 대한 최종 판결은 고수의 몫이고, 어떤 식의 의견 차이가 생길 경우에도 고수에게 답을 구합니다. 하다못해 라운드 후 식사를 위한 식당을 정하는 것조차 고수의 입김이 가장 셉니다. 다음 라운드에 대한 약속 역시 고수가 좌지우지합니다. 이렇게 골프장에서는 고수가 정글의 사자처럼 왕으로 군림합니다. 아마 고수와의 라운드 경험이 있는 모든 골퍼는 다 공감하리라 생각합니다.  

한동안 골프를 안 치다가 다시 시작했는데 예전의 기량이 나올 턱이 없습니다. 너무 오래 쉰 탓도 있지만, 이제는 신체적 현실이 철없는 기대치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급전직하, 하수의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하수의 처지가 너무 낯섭니다. 게임을 할 때마다 당연히 패배의 편에 서는 게 용납이 잘 안 됩니다. 스스로 실망하여 주저앉아 나이를 한탄하다가 불연 듯 이유 모를 믿음에 가득 차 포기의 벼랑 끝에서 다시 일어나 골프채를 잡고 휘둘러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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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필드에서의 믿음은 여전히 미진합니다. 미진한 믿음이 주는 패배의 불안을 덜기 위해 승부가 없는 명랑 골프를 주장합니다. 하지만 너무 느슨한 게임 분위기를 개선하기 위해 작은 내기라도 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면 고작 차 한 잔에 불과한 내기조차 거절하는 옹졸한 인간이 안 되고자 결국 내기에 응합니다. 차라리 금액이 크면 금액 탓을 하며 승부를 피할 수 있는데 그런 탈출구조차 막아 버린 작은 액수이니 피할 도리가 없습니다. 결국 그 적은 금액이 패배를 확실히 각인시킵니다. 드러나지 않는 은근한 마상(마음의 상처)은 자꾸 쌓여만 갑니다. 

이런 슬픈 사정을 하수가 되어보니 깨닫게 됩니다. 사실 골프 게임은 아무리 공정한 핸디를 준다고 해도 결국 카지노에서는 손님이 돈을 잃듯이, 골프 게임의 주인은 늘 고수 차지가 됩니다.

물론 고수는 누릴 만합니다. 그만큼 많은 시간과 노력을 바쳐 상수가 되었으니 그 대가를 받아야 하지요. 그러나 그 대가를 하수에게 패배의 아픔을 안기는 것으로 보상 받는 것은 의도했든 아니든 진정한 고수의 자세는 아닌 듯합니다. 고수의 명예는 내기의 승리로 채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세련된 자세와 정제된 행실만으로 충분히 존경을 받고도 남을 만합니다.

자신과 기량을 잴 만한 또 다른 고수와 승부를 겨루고 내기도 해야 합니다.

진정한 고수는 먼저 내기를 제안하지 않습니다. 주로 내기를 주장하는 인물은 중간급 고수입니다. 군대서도 그렇듯이 늘 중간 선임이 최고참을 제대로 대접하라고 후임에게 강권합니다. 자신이 최고참이 되었을 때 같은 대접을 받을 것을 기대하면서 말입니다. 그렇듯이 골프 역시, 아직 고수라고 하기에는 기량이 만개하지 않은 중간 고수가 최고수를 대접하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은근한 도전의 의기를 내세우며 내기를 권유하지만, 그 팀에 자신보다 약한 하수가 있다면 잠시 돌아볼 일이 있습니다. 적어도 최종 패배로 인한 상처는 내 몫이 아닐 것이라는 내밀한 기대가 깔려있는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게임에서 지더라도 패배의 대가는 자신보다 약한 하수가 대신 지불해야 할 경우라면 내기 주장 역시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자신보다 약자인 하수에 대한 배려 없이 고수에 대한 예의를 내세우며 내기를 계속 주장하는 것은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미운, 말리는 시누이의 행동으로 비칠 수 있습니다.  

결국 꽃은 집니다. 아무리 화려한 꽃이라 해도 언젠가는 시들어 떨어져 가을비에 젖어 세상에서 사라집니다. 화려한 꽃일수록 질 때의 모습은 더욱 초라해 보입니다. 나이가 차면 다 평준화가 이루어집니다. 꽃잎이 떨어지는 시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결국 계절이 바뀌면 모든 꽃이 다 시들어 사라지듯이, 우리 인생도 나이가 차면 화려한 불꽃을 접고 점차 시들어갑니다.  

결국에는 시들어 하수가 된 자신을 수용할 용기가 필요한 듯합니다.  

동년배보다 조금 더 오래 활개를 친다고 으스댈 일이 아닙니다. 세상의 눈에는 다 시들어가는 꽃일 뿐입니다. 언젠가 재가 되어 사라질, 같은 길을 걷고 있는 동료에게 따뜻한 배려의 미소를 보여주는 것이 아름답게 시들 줄 아는 고수의 품격이라고 생각합니다.

고수 행세가 바닥난 어느 늙은 하수의 하소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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