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April 26,Friday

통일 베트남 더 깊이 알기 (5)

사람의이동

통일 베트남 40년, 통일 베트남의 강력함과 자신감이 느껴진다.
한반도 통일 담론에서 베트남은 우리의 선택적 모델이 될 수 없는가의 의문에서 출발하여 통일 베트남의 긍정적 가치를 살펴봄으로 베트남도 우리의 통일 연구의 중요한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의 전환을 시도해 보고자 한다.
“통일 베트남 더 깊이 알기”를 통해 우리의 통일 의지가 다시 불타오르기를 기대해 본다.
통일이 없으면 한민족의 미래는 없다는 절박함이 우리에게 있는가?
통일을 살아가는 베트남 사람을 바라보며 겸손한 마음으로 우리의 통일도 염원해 본다.
분단된 조국을 물려주는 부끄러운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해.

베트남 통일 전후 과정에서 세 번에 걸친 대규모 사람의 이동이 있었다. 사람의 이동은 통일을 실현하는 중요한 힘으로 작용했으며, 통일 이후 진행하는 통합 과정에서도 긍정적으로 작동했다.

첫 번째 이동

1954년 제네바 협정
첫 번째 사람의 이동은 1954년의 일이다. 1954년 7월, 제네바 협정이 실행되었을 때 종교와 사상에 따른 사람의 이동이 발생하였다. 북부 지역 종교인은 남부로 이동하여, 호찌민(사이공) 각 주변 지역을 중심으로 거주하게 되었다. 동시에 남부에서 북부로는 일부 군인과 공산주의자들이 이동하였다. 이 제네바 협정에 근거하면 남북의 인민들은 개인의 자유의지대로 300일 이내에 자유롭게 이동하도록 하였다. 300일 이후에는 17도선을 기준으로 분단하여 2년간 신탁통치 후, 1956년에 시행되기로 약속된 총선을 통해 베트남은 통일된 자주 독립국가가 되는 것을 문서화하였다. 이 기간에 북부에서 약 60-80만 명이 남부로 이동하였는데, 북부에서 남부로 이동한 사람들은 대부분이 가톨릭 신자였다. 남베트남 정부는 북부에서 이주해 온 가톨릭 신자들을 호찌민시에서 가까운 빈호아(Biên Hòa)시를 중심으로 동나이성에 집중적으로 모여 살도록 했다. 2005년 동나이성에서 발행한 연감에 의하면 동나이성은 인구의 약 35%가 가톨릭 신자로 대부분이 북베트남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다. 이로 인해 자연스레 북부문화와 남부문화가 서로 접하게 되고 통합되는 통로가 되었다.

두 번째 이동

미국과의 전쟁 기간
베트남은 정치 체제와 문화가 다른 두 지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1954년부터 1975년까지 베트남은 서로 다른 두 개의 정치 제도를 가지고 두 지역으로 분단되어 있었다. 하나는 북부지역(하노이)이 중심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남부(사이공: 호찌민) 지역 중심이었다. 1960년부터 1975년 사이는 미국에 저항하는 시기였다.

미국이 제네바 협정을 위반하고 베트남의 영구 분단화 조치에 돌입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하노이 폭격에 이어 지상군 파병을 증강하고 우방군의 지원을 요청했다. 하노이 폭격 이후 많은 북부 지역의 청년 단체가 라오스, 캄보디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험준한 산악지대에 호찌민 루트를 만들어 남부로 내려가서 남부 지역 동포들과 함께 미국에 대항하여 싸웠다.
이들은 농촌지역 곳곳으로 흩어져 농민들을 의식화했다. 1965년부터 1975년까지 10년 동안 북베트남(하노이)에서 남베트남(사이공)으로 약 9만 명의 청년들이 내려왔다. 그들 중에는 군인, 고급기술자와 의사들도 있었다. 남부로 내려 간 9만 명 중 약 7,000명이 전쟁에서 희생되었다.

이러한 사람의 이동으로 인해 베트남은 두 지역으로 나눠져 있었지만 1954년부터 1975년 사이에 있었던 사람들의 대규모 이동은 베트남 역사상 유래가 없던 일로 남부 지역과 북부 지역에 각 지역 문화의 통합을 이루기 위한 출발임과 동시에 이질성을 감소시키는데 공헌하였다.

세 번째 이동

통일 이후
세 번째 이동은 1975년 통일 이후의 이동이다. 통일 이후 정부 차원의 남북 통합과 사회주의 경제 정착을 위해 ‘신경제지구 건설’을 추진하게 되었다. 신경제지구 프로그램은 정부가 경작이 필요한 지역으로 이동한 사람들에게 새로운 생활을 시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사회주의 경제 정책의 일환으로 진행된 신경제지구로 사람의 이동이 발생하였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남베트남의 신경제지구로 이동한 사람은 대부분이 북베트남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북베트남 사람이 이동한 남부 지역은 주로 서부 고원 지대와 중부 해안 지역이며 이 지역에 이동한 북부 사람은 노동자와 평범한 인민들이었다.
그리고 남부 지역의 각 도시에 간부급의 북부지역 사람이 배치되었다. 하노이 정부는 통일 이후 남쪽으로 많은 북쪽 지도급 인사들을 이동시켰다. 북부에서 내려와 사상이 투철한 지도급 인사들이 지방 정부, 각 기관, 교육 기관을 관장하였다.

통일 정부는 남북의 통합을 시도함에 있어서 사람들의 이동에 의한 남북통합 정책을 추진했었다. 통일 이후 하노이 정부는 ‘조국은 하나다’라는 푯말을 곳곳에 세우며(특히 소수민족 밀집지역) 국가 통합을 진행했다. 그러나 통합 정책의 난관이 있었는데 그것은 분단을 통한 이질성과 54개의 다민족이었다. 특히 15% 정도를 차지하는 소수민족에 대한 통합정책이 최대의 관건이었다.

1953년 한국 전쟁 종전 이후 2000년도 전까지 한반도의 분단 역사에서 베트남에서와 같은 남과 북 사이에 일어난 대규모 사람의 이동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서면서 북한 이탈주민들의(새터민) 남한 유입이 계속되고 있다. 이들의 안정적 정착과 북한으로의 좋은 소문 전달, 그로 인한 북한 주민들의 남한으로의 대규모 이동은 통일 직전에 일어날 수 있는 현상으로 분석할 수 있다.

독일과 베트남의 통일 과정에서 동일하게 발생한 특징이 사람의 이동이었으며, 이 사람의 이동을 어떻게 수용하고 정책적으로 활용하느냐의 문제가 통일을 실현하고 통합으로 나아가는 관건이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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