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May 5,Sunday

샥스핀, 바다가재, 캐비어, 참치 -천대받던 재료는 어떻게 고급요리가 됐나?

세상에 많은 재료와, 요리가 있지만. 이중에 고급재료로 각광받는 것들이 있습니다. 바닷가재. 참다랑어, 그리고 캐비아, 샥스핀입니다. 특히 이들 재료들은 본래는 가난한 사람이 먹는 천한음식으로 취급 받다가, 역사를 거치면서 고급음식으로 취급 받게 되면서, 위상이 달라진 재료들이라는 특징이 있습니다.어떻게 천한취급을 받던 음식들이 부와 명예의 상징, 사치의 상징이 되었는지를 이번 호 Food Story에서 알아봤습니다.

샥스핀은 어떻게 고급음식이 됐나?
황제가 먹기 싫어서 아래 사람에게 하사한 음식, 성공의 상징이 되다.

삭스핀은 굉장히 희한한 음식 중 하나입니다. 무색 무취인데다가, 영양가도 사실상 거의 없는 음식이기 때문입니다. 본래 14세기 명나라 시절 본초강목에서도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유서 깊은 음식이고, 남방에서 황제에게 바치던 진상품이었지만, 정작 청나라 말기가 될 때까지 황제는 취식 하지도 않았고, 궁에서 일하던 궁인들에게 나누어 주던 상품이었습니다.
중국 역사책 어디를 봐도 황제가 상어 지느러미를 요리한 샥스핀을 먹었다는 기록은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진시황제는 물론이고 당과 송, 원, 그리고 명나라 황제들까지도 샥스핀을 먹지 않았다. 기껏해야 19세기 후반, 청나라 말기의 황제 몇몇이 샥스핀을 먹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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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을 보면 1861년, 다섯 살의 나이로 황제가 된 청나라 동치제가 섣달 그믐날 먹은 만찬에 샥스핀 요리가 보입니다. 이때 모두 16가지 요리가 나왔는데 주로 바다 제비집을 소스로 만든 요리가 중심이었고 그중 일부가 샥스핀을 넣고 끓인 닭고기 요리가 전부였다고 합니다. 동치제의 어머니인 서태후의 아침 수라상에는 보통 22가지 요리가 차려졌다고 하는데 여기에도 상어 지느러미를 넣고 볶은 돼지고기 편육이 겨우 보일 정도입니다. 청나라 말엽의 황제들을 제외한다면 왜 중국 황제들은 이렇게 천하 진미라는 샥스핀 요리를 외면했을까요?

지금은 샥스핀이 값비싼 고급 요리로 알려졌지만 옛날에는 중국에서조차 거의 먹지 못하는 음식 취급을 받았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상어 지느러미는 베트남에서 명나라에 보냈던 조공 품목이었지만 황제는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대신 주방의 요리사들에게 하사품으로 내려 보냈다고 합니다.

또 다른 일화로는 중국의 콜럼버스라고 불리는 정화 함대가 아프리카로 떠날 때 양식이 떨어져 동남아 해안마을의 원주민들이 먹다 버린 상어지느러미를 요리해 먹은 것이 상어 지느러미 식용의 시작이라고 하는데 문헌적 근거는 없습니다

그러나 ‘만한전석’ 이라 불리는 청나라 황실 요리가 생기면서부터 상어 지느러미는 본격적으로 등장합니다.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 황실은 전통적인 한족과의 문화적 유대를 꾀하며 한족과 만주족의 진귀한 요리를 모아 호사스러운 음식을 만들었는데 그 중에서도 상어 지느러미는 가장 귀하게 여겨졌으며 이후 중국 요리의 중심에 서게 됩니다.

식감으로 인정받은 샥스핀
세계적으로 유명한 고가의 진미이긴 하지만 사실 상어 지느러미 자체에는 아무런 맛도 없고 영양학적으로도 두부하나보다 못한 음식입니다. 상어 같은 연골어류는 체내의 삼투압 조절을 위해 요소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고기에서 암모니아 냄새가 나고, 그걸 제거해도 고기 자체의 감칠맛 같은 것이 매우 부족한 편입니다.
그래서 세계 어디를 봐도 연골어류 고기는 먹을 게 없을 때나 먹는 음식 취급인 경우가 많습니다. 식감만 즐기고 맛은 다른 재료로 낸다는 점에선 아귀가 가장 흡사합니다. 아귀 식감이 샥스핀이랑 비슷하다는 건 아니지만. 앞서 같은 연골어류로 설명한 홍어도 그 냄새는 그렇다치고 진짜 맛있는 이유는 역시 식감입니다. 자체로는 거의 맛이 없고, 염장했다가 물로 세척하고 불려서 오돌오돌한 식감으로 먹는 해파리도 삭스핀과 용도가 비슷한 식품입니다.
샥스핀 요리는 젤라틴 그 자체의 식감을 즐기는 음식으로 곤약 같은 식재료와 비슷한 성격이며 이에 같이 수반되는 양념이 샥스핀의 맛을 완성하는 역할을 합니다. 샥스핀의 재료인 상어 지느러미는 조리 과정에서 특유의 조직 특성으로 인해 양념을 100% 가깝게 흡수하기 때문에 한입 먹으면 조직 사이사이 배어든 양념의 맛을 온전히 느끼게 됩니다. 이 말은 양념을 최고급 재료들로 만들면 그 재료들의 맛이 고스란히 전해진다는 말이 되기 때문에 중국에서 최고로 치는 식재료 중 하나인 건화(말린 전복) 따위로 불릴 정도로 내로라하는 고급 식재료들을 사용해 양념을 만듭니다.

샥스핀이 비싼 이유는 샥스핀 자체의 단가보다는 양념에 들어가는 재료의 단가가 어마어마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저렴한 재료들로 만든 염가판도 있지만 샥스핀에 중국인들이 열광하는 이유는 돈을 들이면 들일수록 더 고급의 재료들로 만든 샥스핀을 맛볼 수 있으므로 자신의 부를 과시하거나 성공의 상징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수의 음식 바다가재
고급음식의 대명사가 되다

바다가재, 흔히 랍스터로 총칭하는 본 재료는, 해산물의 꽃이라도 말할 정도로 귀하고, 고급음식으로 평가받는 식재료 중 하나입니다. 바다가재는 갑각류 중에서는 가장 크고 살고기도 많고 갑각류 음식 중 덩치도 크고, 갑각류 특유의 감칠맛도 있기 때문에 바다가재는 유럽에서는 귀한 음식으로 취급되어 왕실에서 먹던 고급음식으로 취급 받았지만, 동시기에 미국에서는 죄수나, 노예에게 먹이는 싸구려 음식으로 취급 받았습니다. 유럽 특히 음식의 맛을 아는 프랑스나 이탈리아, 스페인에서는 고급음식으로 각광받았지만. 북유럽 출신이 대부분인 17세기 미국으로 이주한 유럽계 이주자들에게는 랍스터를 ‘바다의 바퀴벌레’ 취급했을 정도로 골칫거리였습니다.
17세기에 영국인들이 미국과 캐나다에 와서 정착하기 시작했을 때 바닷가에 끊임없이 떠밀려 내려오던 게 바닷가재인지라 공급은 넘쳐났지만 처리하기가 곤란했고, 당시 정착민들이 모여 살던 메사츄세츠주 플리머스(도시)에서는 바닷가재가 쌓인 것이 간혹 보일 정도였습니다.

익숙하지 않은 재료여서 정착민들은 바다가재 요리도 제대로 요리할 줄 몰랐습니다. 산 채로 요리하는 게 아니라 죽은 것을 요리했고, 조촐하게도 물에 그냥 삶아 먹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다가재를 삶은 국물을 버리다 보니 바닷가재의 아미노산이 국물에 그대로 쓸려가니 당연히 맛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가난하고 힘들었던 빈민들과 새 이주민들, 그리고 먹거리를 가릴 수 없던 죄수들에게나 먹이는 음식으로 바닷가재는 위상이 하락했고, 당시 북미에서는 단백질을 얻을 수 있는 가장 흔하고 값싼 방식이었습니다. 사실, 조리법보다도 바닷가재의 평을 떨어뜨렸던 것은 정착 초기의 고달픈 시기에 살고자 질리도록 먹어야 했던 음식이라는 인상, 그리고 그 때문에 비롯된 “빈곤과 퇴보의 징후”라는 상징성 때문에 일부러 피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초기 북미 이민자들이 고향에 보내는 편지에 빈곤해서 허구한 날 바닷가재나 먹고 있다고 푸념하는 내용이라든지 너무 가난해서 먹을 것이 바닷가재밖에 없고 대접할 음식도 바닷가재 뿐이라든가, 집 한구석에 쌓여 있는 바닷가재 껍데기라든지 등 빈곤의 상징으로서의 바닷가재는 당대 문학에서 흔한 클리셰 (진부하고 틀에 박힌 생각) 수준으로 찾아볼 수 있을 지경입니다.

당시 바다가재 수가 어느 정도로 많았나 하면, 현재 미국의 메인주와 매사추세츠주, 캐나다의 노바스코샤, 뉴브런즈윅,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 등 대서양 북부 연안에서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바닷가재를 갈아서 밭에 비료로 뿌리고 낚시 미끼로 달아 사용했을 정도입니다.

철도와 냉장기술이 랍스터의 위치를 바꾸다
비료로 사용될 정도로 위상이 추락했던 바다가재에 대한 인식이 바뀐 것은 철도와 냉장 기술 덕분이었습니다. 당시 익힌 바닷가재는 통조림으로 가공하기 좋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1841년 메인 주에서 바닷가재 통조림 공장이 세워졌는데, 천천히 수요를 늘려가자 통조림 공장은 점점 수를 불려 1870년대에는 메인주의 해안을 따라 23개의 통조림 공장이 2백만 개의 바닷가재 통조림을 생산할 수 있었습니다. 이 시기에는 바닷가재 통조림을 파운드당 11센트에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 공장들의 가공 효율은 워낙 높아서 잡혀 드는 바닷가재의 크기가 줄어들 정도로 남획이 심해졌습니다, 처음 공장에서는 4~5파운드짜리는 작다고 간주되었고 2파운드(약 1㎏)짜리 바닷가재는 가공할 가치도 없다고 여겨졌는데, 10년이 지나자 2파운드는커녕 번식기도 못 지냈을 작은 바닷가재들도 받아야 했을 정도입니다

한두 마리로 통조림을 채울 수 있었던 이전과 달리 열 마리를 들여야 겨우 통조림 하나를 채웠습니다. 더 많은 마릿수의 바닷가재의 살을 발라야 하게끔 변하여 단가가 크게 늘어나자 통조림 공장들은 하나 둘 사업을 철수했습니다.
그 즈음으로 해서 철도가 개통되자 바닷가재 통조림 역시 철로를 따라 유통되었는데, 이미 뉴잉글랜드와 노바스코샤, 뉴브런즈윅,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를 오가는 여행객과 사업가들에 알려졌고, 내륙에 살면서 바닷가재가 싸구려 음식이라는 인식이 없는 이들에게 바닷가재란 통조림에 담긴 것도 즐길만한 맛을 가졌고, 요리사들은 이내 살아있는 바닷가재는 더욱 맛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한때 거대했던 크기의 바닷가재와 달리, 2파운드짜리 바닷가재는 레스토랑의 저녁 메뉴에 들기 적합한 크기였습니다. 산 채로 요리하여 버터, 치즈, 올리브유와 향신료를 더해 화려한 접시에 담자 바닷가재는 고급 음식으로 탈바꿈합니다.
아울러 운송 과정에서 냉장 기술이 유통 거리가 대폭 늘어나서, 보스턴이나 핼리팩스 같은 해안 도시는 물론 시카고와 위니펙과 같은 내륙 도시에도 바닷가재를 산 채로 유통하는 것이 가능해지게 됩니다. 즉 편견이 많은 해안가 고객이 아닌. 편견이 없는 내륙의 고객에게 바닷가재를 팔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런 내륙에서는 유통 비용까지 더하여 산지 가격의 10배에 달하는 가격에 팔려서 바닷가재의 고급 요리로서 가진 면모를 더했습니다. 한편 자원보호도 없이 남획된 바닷가재의 개체수가 줄어들며 어획량은 꾸준히 감소했고 수요가 가파르게 늘어 감에도 공급이 줄어드는 상황이 벌어지자 가격은 폭발적으로 치솟았습니다.

1889년부터 1898년 사이에 바닷가재의 평균가는 4배로 뛰었으며, 그 이후에도 계속하여 올랐다. 이러한 상승세를 가로막은 것은 1920년대의 막바지에 들이닥친 대공황이었습니다. 경제 침체로 고급 음식을 즐기는 수요층이 사라지면서 바닷가재는 다시 공장에서 통조림으로 가공되는 신세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시기에 바닷가재는 다시 개체 수를 일부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2차세계대전을 거치며 다른 음식과 달리 배급이 되지 않던 희소성 덕분에 그 위상이 다시 한 번 올랐고, 시간이 흘러 현재와 같이 바닷가재=비싼 고급음식의 위상으로 올라가게 됩니다.

캐비아
어부의 싸구려 음식에서,유럽의 럭셔리가 되다

철갑상어의 알을 가공하거나 염장 처리 한 식품을 일컫는 말. 즉, 서양식 생선 알 젓갈이 바로 캐비아입니다. 캐비아는 사실 기원전 3세기로 추정될 정도로 오래된 역사를 지닌 음식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력셔리의 상징이 된 캐비아는 본래 죄수나, 노예가 먹던 음식으로 시작하여, 럭셔리의 상징으로 우뚝 서게 된 역사가 있습니다.
송로버섯과 마찬가지로 캐비아는 그 희귀함과 풍미 때문에 최고급 식재료로 손꼽히고 ‘바다의 보석’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입니다. 또한 수요는 꾸준하기 때문에 가격이 상당히 높은 편입니다.

캐비아라는 말은 튀르키예어 Havyar에서 왔고, 이 단어도 생선알이라는 뜻인 khaya와 출산이라는 뜻인 dar를 합성한 페르시아어 단어에서 유래했습니다. 캐비아 중 약 90%를 생산하는 러시아에서는 검은 생선알이라는 뜻인 ‘초르나야 이크라'(чёрная икра)’라고 부르며 짧게 ‘이크라'(икра)라고도 합니다.

캐비아도 영양가는 많은 음식은 아니지만, 입에서 씹는 순간 터져 나오는 감칠맛과 풍미는 대체 불가능한 진미라고 알려졌습니다. 특히 버터를 연상하게 될 정도로 크림 같은 질감과 함께 입으로 뿜어지는 견과류나 버터 등에서 오는 독특한 풍미, 강렬한 감칠맛과 어울리는 염도 뒤에 살짝 올라오는 비릿함은 오늘도 전 세계 미식가를 매료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어부들이 먹던 싸구려 음식이
부와 명예의 상징으로

고대 로마 제국 시절만 해도 철갑상어 캐비아는 가난한 어부들이나 먹는 싸구려 음식으로 취급 받았던 음식입니다. 사실 로마인들이 본 음식을 싸구려 취급했던 이유는 간단합니다. 철갑상어가 흑해와 동 지중해에서는 당시에는 흔했던 어류였고, 당시에는 염장기술이 발달하지 않아서 알이 쉽게 상한다는 단점이 있었으며, 아울러 그리스에 영향을 받았지만 자신들은 유약한 그리스인들과 달리 상무적으로 우월하다 여겼던 로마인들이 그리스 인들이 좋아하는 음식이라는 이유로 천시하는 일이 잦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기원전 3세기부터 오랜 기간 알려졌던 캐비아는 그리스에서는 사랑을 받았지만, 로마시대에는 천대를 받기 시작했고, 이 후로 다시 주목을 받고 럭셔리 음식이 되는 데에는 기원 후 8세기까지 약 1000년 이상을 다시 기다려야 했습니다.

8세기 초 동유럽에 정주하던 슬라브족 어부들은 볼가강에서 거대한 철갑상어 어업이 행해졌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당시에는 철갑상어수가 워낙 많았지만, 지금의 카스피해, 흑해지역에서 생산되던 캐비아는 이 지역을 상징하는 특산물로써 제노아, 베니스, 비잔틴 상인들이 유통을 담당했지만, 워낙 흔해서 한국에서 명란젓이 흔해 빠져서 싼 값에 먹듯이. 캐비아도 당시에는 그런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러나12세기경 철갑상어 개체수가 줄어들기 시작하면서 흔한 음식이었던 캐비아는 비싼 음식으로 바뀌게 됩니다.

특히 볼가강과 연결된 카스피해의 천연 어류 자원이 줄어들기 시작했고, 이 지역의 몽골의 유럽침공과 이후의 불안정한 지역정세로 인해 영토를 둘러싼 분쟁과 충돌이 발생하면서. 철갑상어를 구하기는 더욱 어려워졌고 결국 캐비아는 러시아의 농민 음식에서 왕실 별미로 매우 빠르게 변모하게 됩니다. 이후 18~19세기 유럽에서는 캐비아는 부와 지위를 상징하는 고급 식재료가 되었으며 당시 세도가나 왕실에서는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손님을 위해 신선한 캐비아를 항상 준비해 두는 것을 자랑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캐비아를 유통하는 데 큰 영향을 준 인물이 요아니스 바르바키스(Ioannis Varvakis) 입니다. 한때 해적이었던 그는 그의 탁월한 사업수완을 러시아가 인정했고 카스피해 아스트라한에서 어업을 개발합니다. 참피 나무통을 이용해 먼 곳으로도 유통이 가능하게끔 만들어 크게 성공하면서 캐비아는 럭셔리 음식으로 전세계에 소개됩니다.

러시아 혁명 이후 소련이 들어서면서 캐비아를 즐겨 먹던 귀족 계급이 소련에서 타국으로 망명하거나 귀족 신분을 숨기고 숨어 지내는 상황이 펼쳐지자 캐비아의 수요가 대폭 감소했습니다. 이 때문에 소련의 외교관들은 당시 농업 생산량이 급감한 것도 있고 해서 서방에 캐비아를 수출하여 부족한 외화를 보충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서방 각지에서 캐비아 무료 시식회 등을 열었습니다. 처음에는 서방 국가 사람들이 캐비아 맛에 익숙하지 못한 것도 있고 해서 한 입 먹고 뱉는 일이 많아서 캐비아 시식회 때 따로 입에 넣었던 캐비아를 뱉는 통까지 따로 준비 했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시식회를 통해 캐비아 맛이 일반대중에게 알려지고 미국에서 러시아에서 탈출한 반공 난민들이 자리를 잡으면서 이들에 의해 캐비아가 러시아 황실과 귀족들이 즐기던 고급 만찬이라는 이미지가 보급되면서 수출 판로가 열렸고 소련이 서방으로 수출하는 주요 기호품 품목 중 하나로 자리매김합니다.

상류층을 동경하는 사람이 좋아하던 러시아 특산물인 자연산 철갑상어 알은 이제는 찾기 힘듭니다. 지난 90년대까지만 해도 세계 시장의 80%를 차지하던 러시아 산 캐비아는, 캐비아 생산을 정부에서 직접 관리한 소비에트 연방 붕괴 후 정부관리가 사라지자 러시아 전역에서는 철갑상어를 남획현상이 발생했고 이로 인하여 철갑상어 개체 수가 심각한 수준까지 떨어지게 됩니다. 결국 러시아 정부가 철갑상어 양식장 50곳을 집중 관리하고 오래도록 캐비아를 생산하던 캐비아 생산 중심지인 카스피 해에서 2002년부터 철갑상어 조업금지령을 선포했을 정도입니다. 이러한 노력으로 중국과 아제르바이잔 등에 빼앗긴 점유율을 어느정도 회복하는 데에 성공합니다.

가난한 어부들이 먹던 싸구려 음식이 부와 명예의 상징으로

고대 로마 제국 시절만 해도 철갑상어 캐비아는 가난한 어부들이나 먹는 싸구려 음식으로 취급 받았던 음식입니다. 사실 로마인들이 본 음식을 싸구려 취급했던 이유는 간단합니다. 철갑상어가 흑해와 동 지중해에서는 당시에는 흔했던 어류였고, 당시에는 염장기술이 발달하지 않아서 알이 쉽게 상한다는 단점이 있었으며, 아울러 그리스에 영향을 받았지만 자신들은 유약한 그리스인들과 달리 상무적으로 우월하다 여겼던 로마인들이 그리스 인들이 좋아하는 음식이라는 이유로 천시하는 일이 잦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기원전 3세기부터 오랜 기간 알려졌던 캐비아는 그리스에서는 사랑을 받았지만, 로마시대에는 천대를 받기 시작했고, 이 후로 다시 주목을 받고 럭셔리 음식이 되는 데에는 기원 후 8세기까지 약 1000년 이상을 다시 기다려야 했습니다.

8세기 초 동유럽에 정주하던 슬라브족 어부들은 볼가강에서 거대한 철갑상어 어업이 행해졌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당시에는 철갑상어수가 워낙 많았지만, 지금의 카스피해, 흑해지역에서 생산되던 캐비아는 이 지역을 상징하는 특산물로써 제노아, 베니스, 비잔틴 상인들이 유통을 담당했지만, 워낙 흔해서 한국에서 명란젓이 흔해 빠져서 싼 값에 먹듯이. 캐비아도 당시에는 그런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러나12세기경 철갑상어 개체수가 줄어들기 시작하면서 흔한 음식이었던 캐비아는 비싼 음식으로 바뀌게 됩니다.

특히 볼가강과 연결된 카스피해의 천연 어류 자원이 줄어들기 시작했고, 이 지역의 몽골의 유럽침공과 이후의 불안정한 지역정세로 인해 영토를 둘러싼 분쟁과 충돌이 발생하면서. 철갑상어를 구하기는 더욱 어려워졌고 결국 캐비아는 러시아의 농민 음식에서 왕실 별미로 매우 빠르게 변모하게 됩니다. 이후 18~19세기 유럽에서는 캐비아는 부와 지위를 상징하는 고급 식재료가 되었으며 당시 세도가나 왕실에서는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손님을 위해 신선한 캐비아를 항상 준비해 두는 것을 자랑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캐비아를 유통하는 데 큰 영향을 준 인물이 요아니스 바르바키스(Ioannis Varvakis) 입니다. 한때 해적이었던 그는 그의 탁월한 사업수완을 러시아가 인정했고 카스피해 아스트라한에서 어업을 개발합니다. 참피 나무통을 이용해 먼 곳으로도 유통이 가능하게끔 만들어 크게 성공하면서 캐비아는 럭셔리 음식으로 전세계에 소개됩니다.

러시아 혁명 이후 소련이 들어서면서 캐비아를 즐겨 먹던 귀족 계급이 소련에서 타국으로 망명하거나 귀족 신분을 숨기고 숨어 지내는 상황이 펼쳐지자 캐비아의 수요가 대폭 감소했습니다. 이 때문에 소련의 외교관들은 당시 농업 생산량이 급감한 것도 있고 해서 서방에 캐비아를 수출하여 부족한 외화를 보충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서방 각지에서 캐비아 무료 시식회 등을 열었습니다. 처음에는 서방 국가 사람들이 캐비아 맛에 익숙하지 못한 것도 있고 해서 한 입 먹고 뱉는 일이 많아서 캐비아 시식회 때 따로 입에 넣었던 캐비아를 뱉는 통까지 따로 준비 했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시식회를 통해 캐비아 맛이 일반대중에게 알려지고 미국에서 러시아에서 탈출한 반공 난민들이 자리를 잡으면서 이들에 의해 캐비아가 러시아 황실과 귀족들이 즐기던 고급 만찬이라는 이미지가 보급되면서 수출 판로가 열렸고 소련이 서방으로 수출하는 주요 기호품 품목 중 하나로 자리매김합니다.

상류층을 동경하는 사람이 좋아하던 러시아 특산물인 자연산 철갑상어 알은 이제는 찾기 힘듭니다. 지난 90년대까지만 해도 세계 시장의 80%를 차지하던 러시아 산 캐비아는, 캐비아 생산을 정부에서 직접 관리한 소비에트 연방 붕괴 후 정부관리가 사라지자 러시아 전역에서는 철갑상어를 남획현상이 발생했고 이로 인하여 철갑상어 개체 수가 심각한 수준까지 떨어지게 됩니다. 결국 러시아 정부가 철갑상어 양식장 50곳을 집중 관리하고 오래도록 캐비아를 생산하던 캐비아 생산 중심지인 카스피 해에서 2002년부터 철갑상어 조업금지령을 선포했을 정도입니다. 이러한 노력으로 중국과 아제르바이잔 등에 빼앗긴 점유율을 어느정도 회복하는 데에 성공합니다

 

참치
피가 많다고 기피하던 음식에서, 고급 스시의 대명사가 되다.

참치는 세계적으로 인기가 많은 어종입니다. 회부터 시작해서, 인기 있는 반찬이자 다이어트 음식인 참치통조림에다가, 고급 회집에서 자주 사용하는 참치 뱃살 부위에다가, 심지어 참치를 해체하다가 남은 부위인 갈비살 부위도 네기토로라고 해서 사용할 정도로, 전세계적으로 이렇게 널리 쓰이는 어류도 드물 것입니다.
참치는 사실 식용으로 쓰기에는 냉동기술이 만들어지기 이전에는 어려웠다고 합니다. 특히 다랑어 군은 빠른 속도로 바다를 떠도는 생선이기에 잡혀서 선상에 오르면 산소부족으로 바로 죽기 십상이었고 신선도를 유지시킬 얼음제조와 같은 냉동기술이 부족했기에 부두에 들고 오면 살코기 빼고는 내장과 가까운 뱃살과 같은 부위는 부패하기 일쑤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참치는 보존식인 통조림으로 출발합니다 서양에서 정어리 어획량이 줄자 많이는 잡히는데 쓸모 없던 다랑어를 무차별적으로 통조림으로 만들기 시작한 것이 역사라고 합니다.
참치통조림이 처음 개발된 시기는 1904년,미국 캘리포니아입니다. 당시에는 정어리 통조림이 생선 통조림 중에서도 가장 보편적이었는데, 정어리 철인데도 불구하고 정어리는 많이 잡히지 않고, 대신 인기가 없었던 생선 참치, 특히 날개다랑어가 상당히 많이 잡혀서 식품 사업가인 알버트 P. 하프힐(1847~1924)도 정어리 사업을 하던 중이었는데 정어리가 잡히지 않아 사업이 적자를 보자 대신 참치를 가공해 보기로 합니다.

그는 자신의 공장에서 참치의 살코기를 분리해 내고 남은 고기를 고온의 찜기로 조리해 으깬 다음 깡통에 담아 그것을 미 전역의 식료품점에 판매하기 시작합니다. 정어리가 흉어가 되었고 비인기 생선이라 값이 싼데다 큰 몸집을 가져 고기도 많이 나와 참치통조림은 당대 미국에서 많은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판매 첫 해에는 700개가 팔렸고, 1914년부터는 매년 40만 개가 팔리는 인기 품목이 되었습니다.

또한 알버트는 자신이 개발한 최초의 참치통조림의 이름을 Chicken of the Sea(치킨 오브 더 씨, 바다의 닭고기)라고 부르기 시작했는데, 이때 설립된 회사가 치킨 오브 더 씨(Chicken of the sea)입니다. 스팸처럼 보존식으로 소개된 참치는 70여년 전 까지만 해도 어종자체의 특성인 피가 많다는 특성으로 인하여 횟감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도 바뀌게 되는 계기가 바로 일본내의 미군정과, 급속 냉동기술의 발달입니다.

미군정이 바꿔버린 일본인의 맛
19세기에 발간된 <에도(도쿄)풍속지>에 따르면 18세기 중기까지는 참치는 몹시 천한 생선으로 분류하여 상인들도 부끄러워 대놓고 먹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고대 일본에서 참치가 ‘시비’라고 불렸던 데에서 기인합니다. 일본어로 ‘죽은 날’의 발음이 ‘시비’와 같아서 참치는 불길한 생선으로 여겨졌고, 또 다량의 피가 함유된 붉은 살 생선들은 부패가 매우 빨라 내륙까지 가져오기가 힘들었고, 일본의 옛 귀족들은 자연스럽게 접하기 힘든 붉은 살 생선 대신 흰 살 생선을 선호했기에 더욱 급이 낮다고 평가받았다고 합니다.

에도 시대에 들어서면서 참치는 ‘시비’에서 ‘마구로’로 불리게 되었고, 어획량이 늘었지만.냉장기술 미흡과 내장처리를 안 하는 바람에 내장이 녹아 뱃살 부위를 못 먹게 되어 고양이나 개도 거르는 생선의 이미지로 남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다랑어계열 생선의 어획량이 늘어나고, 처리노하우도 발전하면서 참치 순살을 횟감으로 먹기 시작했지만. 1960년대 까지는 참치회는 싸구려로 인식하는 경우가 다수였습니다. 그러다가 일본이 패망하면서 시작된 미군정이 참치를 고급화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듭니다. 2차대전 패망 이후 일본인들은 미군정의 영향으로 기름진 음식을 접하게 되면서 입맛에 변화가 생겼고. 이때 참다랑어의 어류이면서 쇠고기와 같은 마블링을 가진 뱃살을 이용한 스시들이 주목받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1980년대 스시의 세계화가 시작되면서 다양한 재료를 활용한 스시가 만들어 졌지만, 와규 소고기와 식감이 비슷한 참치 뱃살이 주목받는 부위로 떠오르게 되면서 참치의 위치는 싸구려 재료에서 고급재료로 거듭나는 계기가 됩니다. 이때 오도로 주도로( 대뱃살, 중뱃살)열풍이 일본전역에 불면서, 일본 항공은 아예 미국의 낚시 어선과 전속계약을 맺어 처치 곤란이던 참다랑어들을 냉동 시켜 일본으로 가져오는 등의 행보와 더불어, 스시체인 회사 등이 신년 이벤트로 참치 해체쇼 등을 하면서 고급 이미지를 확보하게 됐고, 결국 90년대 이후에는 참치는 고급 스시 재료로 확고하게 자리매김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일본인들의 참치 사랑은 지금도 변하지 않아서 2017년 기준으로 세계의 참다랑어의 소비량 순위를 살펴보면 1위가 일본, 2위가 미국, 3위가 대한민국이고 현재도 큰 변화가 없을 정도 입니다.

남획으로 몰살 위기에 처한 참다랑어
남들 보지 못하게 몰래 먹어야 했을 정도로 천한 재료에서, 지금은 고급으로 인식되고 바다의 쇠고기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인기가 많아진 참다랑어(참치)의 성공은 참치가 멸종위기보호종이 됐을 정도로 심각한 남획 문제를 부르고 있습니다. 참다랑어는 크기로 인하여 완전히 성장하는 데에 긴 시간이 걸리는 데다가 편의성을 위해 그물을 이용한 대량 포획을 하다 보니 포획률이 번식률을 아득히 뛰어 넘었습니다, 결국 개체수가 크게 줄어들기까지 했습니다.

어획량을 규제하려고 노력함에도, 참치의 수요로 인하여 많은 국가들이 반칙 어획을 하기 때문에 국제사회에서 비난을 받고 있는 상황입니다. 결국 2012년의 참다랑어 포획률이 1960년도에 비해 약80%나 감소하였으며, 이대로 가면 가까운 미래에 멸종할 가능성이 커졌다고 합니다. 결국 IUCN 적색 목록에서 취약(VU)으로 분류되었는데, 이는 향유고래와 판다의 멸종 위기 등급과 똑같다는 얘기일 정도로 참다랑어는, 고급 생선으로 평가받는 지금 아이러니 하게도 다량으로 소비되면서 멸종위기에 처하는 상황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재료는 결국 인간이 만든다
지금까지 천대받다가 시대가 지나면서 고급재료가 된 음식들의 스토리를 알아봤습니다. 음식이 샥스핀이든, 참치든, 랍스터이든 송로버섯이든지 간에 이번 스토리로 확인할 수 있었던 부분은 사람의 관점이 음식의 지위를 정하는 경우가 잦다는 점과 기술의 발달로 용이한 식용이 가능해지면서 고급재료가 된 식자재들이 많다는 점입니다.

특히 참치처럼 피가 많고, 말의 의미가 불길하다는 이유로 대놓고 먹지 못했던 음식이,
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시대가 변하면서, 이제는 없어서 못 먹을 음식이 되는 사례를 보면, 편견과, 관점이 한 음식의 운명을 바꾸었다고 말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시대가 지나면서 외면 받던 재료들이 고급재료로 떠올랐듯이. 지금 우리가 흔하게 먹고 있는 음식도 100년~200년 뒤에는 고급요리의 대명사가 될 지로 모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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